자신의 시처럼 하늘로 돌아간 고 천상병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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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구걸·주벽·행방불명 등 숱한 일화남겨/현실외면한 삶서 티없는 시세계 펼쳐
52년 문단에 나와 40여년간 구걸한 막걸리 두사발 혹은 맥주 두병으로 끼니를 이으며 시만 써오던 천상병씨가 밥을 먹다 타계했다.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쓰러져가는 오두막에서 함께 늙어가던 장모와 뒤늦은 아침식사를 하다 두어술 뜨던 수저를 놓고 쓰러졌다.
『인세를 모아 장모님 장례비까지 마련해 놓았으니 더할 나위없이 좋다』던 천씨. 그 천생의 시인이 장모의 부축으로 병원으로 옮기던중 숨마저 놓아버렸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귀천』에서 노래했던 천씨가 하늘로 돌아가던 날은 찬비가 뿌렸다. 문단에 채 연락이 안되고 교통편도 멀고 외져 영안실 첫밤은 노동자시인 김신용씨 등 몇명만이 찬술을 부으며 천씨의 기구한 삶,그리고 그 정반대의 티없던 시세계를 쓸쓸히 되새겼다.
경남 창원에서 출생,마산중을 거쳐 서울대상대를 졸업한 천씨는 그만한 학력으로 보장될 수 있었던 일체의 직장을 뿌리치고 시작에만 몰두했다. 현실세계에 편입돼서는 도저히 시의 순수성을 지켜낼 수 없다는 남다른 생각으로 무직·방랑·주벽·구걸 등으로 숱한 화제를 뿌리며 비단결같은 인생의 깊이를 노래해왔다.
시를 지키기위해 현실을 내던졌던 천씨를 67년 공안당국은 간첩혐의로 잡아 모진 고문을 가했다. 동베를린사건의 작곡가 윤이상씨와 단지 고향이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버지 어머니는/고향산소에 있고//외톨박이 나는/서울에 있고//형과 누이들은/부산에 있는데,/여비가 없으니/가지 못한다.//저승가는데도/여비가 든다면/나는 영영/가지도 못하나?//생각느니 아,/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소륭조』 전문).
전기고문의 후유증과 유리걸식으로 지칠대로 지친 천씨를 요양시키기 위해 문단 동료들이 여비를 마련,70년 겨울 형과 누이가 있는 부산으로 내려보냈다. 그러나 친구들이 못내 그리워 서울로 다시 돌아온 천씨는 경찰에 행려병자로 오인돼 따뜻한 국반 한그릇을 얻어먹고 나서는 아무도 모르게 서울시립 정신병원에 「수감」돼 버렸다.
문단에서는 부산에 연락해보아도 소식이 없고 또 「저승 여비」 운운하는 시까지 발표했던 터여서 천씨가 틀림없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71년 유고시집으로 『새』를 출간,그의 혼을 달랬다.
그런 천씨가 이제 정말로 숨을 거둬 고향에도 못가고 의정부 송산시립묘지에 묻히게 됐다.<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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