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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쪽 육아책 옮긴 84세‘이야기 할머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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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이학선(84·사진) 할머니는 일본에 다녀온 아들 정병호(52)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에게서 책 한 권을 소개받았다. 제목은 『연령별보육강좌(年齡別保育講座)』. 일본의 진보적 육아연구기관인 오사카보육연구소에 소속된 교사·연구자·학부모 등의 집단육아 노하우를 1세부터 6세까지 나이별로 정리한 6권짜리 책이었다.

 이씨는 “이들의 소중한 체험과 철학을 우리나라 어린이집 교사들이 나눠가졌으면 좋겠다”는 아들의 권유에 이내 번역을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 때 소학교(초등학교) 교사를 했던 일본어 실력이 바탕이 됐다.

 70대 초반의 나이에 돋보기 안경을 끼고 꼬박 3년이 걸려 옮긴 원고는 대학노트로 24권. 이것이 최근 『우리 아이 어떻게 키울까?』(보리)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2003>“분량이 1300여 쪽이나 돼 출판사를 찾기가 힘들어 출판은 사실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어린이집 교사들의 자료집으로 활용되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던 차에 이렇게 책으로 나오게 돼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평소 품고 있던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번역 작업의 어려움을 상당 부분 덜어준 눈치다. 이씨는 경기도 과천시의 공동육아 어린이집 두 곳에서 ‘이야기 할머니’로 10년간 활동해왔다. 매주 2회 어린이집 점심식사가 끝나고 낮잠을 자기 전 20∼30분간 아이들에게 전래동화를 들려준다.

 “이야기책을 구입해 기본적인 내용을 암기한 뒤 상황에 맞게 각색을 합니다. 내용이 어렵다 싶으면 쉽게 풀어주고, 사이사이에 질문도 하지요. 실감 나게 전해주려고 거울 보면서 연습도 해요.”
 
‘이야기 할머니’ 노릇이 너무 보람 있어 이사도 미뤘을 정도란다. 올해부터는 당뇨로 인한 백내장 등 때문에 눈 수술을 세 차례 받아 아이들을 전혀 만나지 못했다. 이씨는 “책을 번역하면서 동화를 들려주면 까르르 웃고 좋아하던 아이들 얼굴이 많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이 책을 보면 오사카보육연구소에서는 장애아동과 비장애아동의 통합교육을 실시해 어렸을 때부터 같이 울고 웃으며 서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칩니다. 또 1∼6세 시기에는 무엇보다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바깥 놀이’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지요. 맞벌이 여성들의 큰 관심사이기도 한 0∼1세 영아 보육에 대한 인식도 새롭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 부모와 교사들이 이들의 육아경험 중 배울 부분을 잘 골라내 우리 현실에 맞게 적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글=기선민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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