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계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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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레믹스 카메라로 잘 알려진 아남정밀이란 회사가 91년 무너졌을때 이 회사 나정환사장이 자기 주식을 임직원등 45명의 이름을 빌려 위장분산시켜 왔던 사실이 함께 밝혀져 큰문제가 됐었다. 당시 국세청은 비록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름을 도용당했다 할지라도 일단 증여로 간주하고 이름을 빌려준 이들에게 증여세를 물리겠다고 해 논란이 됐으나 결국 세금은 매기지 못했다.
주식투자자라면 한번쯤 들어보았을 큰손「광화문곰」고성일씨(71)도 서울광화문 네거리에 세형상사란 이름의 사무실을 갖고 있었는데 이 사무실이란게 자기 이름의 주식보다는 가깝게 지내는 여러 사람이름으로 투자해 놓은 주식계좌나 부동산을 관리하는 회사였다.
89, 90년 주가가 죽죽『 올랐을 때 일찍 주식투자에 눈떴던 사람들은 친구나 친지이름으로 주식계좌를 트고 증권사에서 외상으로 돈을 빌려 신용으로 주식을 사들였다가 주가가 떨어지는 바람에 이른바 「깡통계좌」가 됐다. 급기야 91년10월10일 당국이 이 깡통계좌를 일제히 정리하고 나서자 이름을 빌려주었거나 도용당한 친지·친구들에게 월급차압 또는 재산압류라는 날벼락이 떨어지기도 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차명 주식계좌가 낳은 부작용과 후유증이다.
가명으로 주식계좌를 트고 거래를 하면 이자와 배당에 대한 소득세율이 실명보다 높다. 증권사에서 돈을 빌려 주식을 사는 신용융자가 안된다. 또 어떤 기업의 공개 때 공모주청약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가명주식계좌의 대표적인 경우는 상장사의 대주주와 특수관계인·임직원이다. 이들은 자신이 관계하고 있는 회사의 주식을 이 가명계좌로 위장분산시켜 놓고 회사가 신제품을 개발했다든지, 곧 어렵게 된다든지와 같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내부정보를 이용해 미리 주식을 팔아 이득을 챙기거나 손실을 막는다. 실제로 상장사가 부도를 내거나 사실상의 부도인법정관리를 신청했을 경우 이렇게 대주주나 그 친인척인 특수관계인·임직원들이 미리 주식을 팔아치워 손실을 막았던 경우가 여러 차례 적발돼 사법처리의 대상이 됐었다.
내부자 거래를 할 수 없는 증권사 직원들 중 일부도 가명계좌를 이용해 증권사 일을 보면서 얻은 정보로 불공정거래를 하는 경우가 있다. 소수지만 일반 회사원들도 더러 가명으로 투자한다. 이들은 직장에 자신이 주식투자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부류로 증권사 직원들에게 「회사로는 전화하지 말라」「내가 전화를 걸때까진 미리 전화하지 말라」 등의 주문을 해댄다. 그러나 역시 가명주식계좌의 핵심은 이른바 큰손들이다. 사채업자와도 연계된 이들 큰손들은 한꺼번에 수억원씩의 주문을 내 주식을 사고 판다. 따라서 가명주식계좌의 평균잔고는 지난 3월말현재 3천7백만원으로 실명계좌 평균잔고(1천2백만원)의 3배가 넘을 정도로 단위가 크다.
큰손들은 자신이 무슨 종목을 샀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본인이 증권사 객장에 나타나지도 않고 대부분 대리인을 시킨다. 한 증권사 지점에서 집중거래하지 않고 여러 증권사, 수개 지점에 분산해놓아 투자성향을 파악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가명계좌의 거래는 거액수표가 거의 없고 현금이나 10만원권 수표가 대부분이다. 증권감독원이 일선 증권사에 나가 검사를 할 경우 우선적으로 보는게 이 가명계좌이므로 자금추적하기가 어렵도록 현금이나 10만원권 수표를 쓰는 것이다.
차명주식계좌는 사실상 실명거래와 아무런 차이없이 이뤄져 실제로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조차 없다. 증권사 직원들은「감」으로 볼 때 전체 계좌수의 15%선이 차명계좌일 것으로 본다. 지난 3월말 현재 활동계좌가 2백27만계좌이므로 34만계좌 정도가 차명이라는 이야기다.
이 차명계좌는 공모주청약을 많이 받기 위해 근로자증권저축(연간 6백만원)이나 근로자주식저축의 한도(연간 5백만원)까지 나눠서 계좌를 만드는 경우가 꽤 있다. 증권사 직원들이 자신들의 주식투자가 금지돼있는 상태에서 고객들이 맡기는 돈을 관리해주면서 차명계좌로 굴리는 경우도 상당하다. 몇 년 전에는 어떤 증권사사장이 차명으로 2천만원어치의 주식투자를 했다가 적발돼 물의를 빚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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