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한파/여야의원들 주머니썰렁/“청와대도 안받는데…”꼬리감춘 돈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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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후원금 격감… 지구당 줄여 군살빼기 민자/“민원 기대할 것 없고 공개된 재산 많더라”발길 돌려/점심초청까지 끊겨… 보릿고개 실감 민주
재산공개 파동에 뒤이은 「사정추위」로 여야 의원들의 주머니 사정이 한결 어려워지고 있다.
그동안 의원들의 지갑을 채워주면서 반대급부를 노리던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에서는 의원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춰버렸다. 또 선의의 정치자금 제공자들도 재산공개때 자신들에게 손을 내밀던 의원들의 재산이 만만치 않은 것을 알고는 도움을 주는데 소극적이라는게 의원들의 호소다. 게다가 김영삼대통령이 재임중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해 의원들은 예전처럼 아무 돈이나 받을 수도 없게됐다.
○사업가·변호사 추위 덜타
○…민자당 지역구 의원들에게 닥친 공통된 어려움은 의원별 후원회의 후원금이 최근들어 엄청나게 줄어든 것이다.
민정계의 한 재선의원은 『중소기업가·학교 선후배 등이 주축이 된 후원회의 후원금이 준 것은 그동안 갖가지 아쉬운 민원부탁을 하던 회원들이 당분간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 꼬리를 빼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수입(?)이 줄어들자 의원들은 3만∼5만원씩 해오던 축의금을 1만5천원짜리 커피잔 세트로 때우는 등 월평균 2천5백만원 정도 들던 지구당 관리비를 1천만원 정도 줄이고 있다.
나머지 1천5백만원도 몸으로 때우기 위해 한달에 보름정도 지역구에 머무르는 사람이 많다. 서울에 있어봐야 입조심이나 해야하고 별 볼일이 없기 때문이다.
4선에다가 사무총장을 지낸 김영구원내총무(서울 동대문을) 마저 최근들어 유급지구당요원 4명을 감원했는데 『그동안 월평균 1천7백만원 정도 나가던 관리비를 9백만원 정도로 줄였다』며 『앞으로는 후원회의 후원금 한도액(지구당 후원회의 연간 후원금 상한선은 1억원) 안에서 지구당을 꾸려나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미 3월말 지구당 유급당원 5명을 정리한 강재섭대변인(대구 서을)은 『이런 풍토가 정착되면 오히려 정치자금이 적게들어 의원들의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이권을 바라는 관내 사업가들이 많이 낀 후원회의 도움으로 지구당을 꾸려왔던 의원들은 요즘 십중팔구 어려움을 겪고있다. 또 재산공개 결과 알부자로 밝혀진 의원들 대부분이 후원회와 독지가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다만 사업가 또는 변호사 출신 등은 추위를 덜타고 있다. 변호사를 개업한 김영일의원(경북 김해)은 개인 후원회가 없는 대신 고문변호사 활동으로 버는 돈으로 지구당 관리비와 활동비를 쓰고있다.
김 의원은 『고문변호사를 맡고있는 기업체들의 각종 법률상담을 해주고 매월 1천5백여만원의 고문료를 받고있다』고 말했다. 당초부터 재력이 빈약하고 후원회도 별볼일 없었던 일부 초선의원들은 오히려 고통을 덜 느끼고 있다. 민주계의 한 초선의원은 최근 『이런 분위기가 계속될 경우 후원금을 낸 회원이 민원이라도 부탁해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생각에서 후원회 조직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이번 재산파동으로 많은 국민들 사이에 「국회의원=부동산 등 재산이 많은 사람」이란 고정관념이 생기는 바람에 돈 없는 우리같은 사람들은 돈이 없다고 해봐야 믿어줄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돈 얘기만 나오면 손사래
○…민주당은 광명 등 세곳의 보선후보들을 지원하기 위해 평의원 50만원,당12역 1백만원,당3역 2백만원,최고위원 1천5백만원씩 각각 할당했으나 모금에 상당히 애를 먹었다. 김덕규사무총장은 「돈」얘기만 나오면 절레절레 고개부터 가로젓는다.
여당에 비해 자금사정이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야당이긴 하지만 사정의 「추위」를 타기는 마찬가지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후원자로부터의 「점심」약속이 뚝 끊기거나 연락의 빈도가 눈에 뛸만큼 줄었다고 한다.
『전에는 상임위와 관계있는 회사직원 등을 통해 기업체 대표들로부터 식사라도 같이 하자는 연락이 오곤 했으나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요. 많이 달라졌습니다.』(이해찬의원),『한달비용이 적어도 5백만원은 돼요. 그래도 나는 조금 쓰는 축에 들어갑니다. 솔직히 지역구가 광주라 비교적 눈치를 덜보는 지역인데도 요즘은 용돈이 없을 정도로 어려워요.』(조홍규의원)
최근 이동근의원 구속으로 사정의 칼날이 야당으로 향하는 징후를 보이자 어려움은 더 가중될 기색이라고 지레 걱정이 태산이다.
후원자들이 사정당국의 눈초리를 의식,잔뜩 몸을 사리고 있는 탓이다.
『지원자 명단에는 넣지 말아달라고 부탁이 와요. 안그러면 조금씩은 도와줄 수 있다는거겠죠. 이름이 밝혀지면 국세청 등에서 조사할 가능성도 있다는 걱정이에요.』(이상천의원),『기업체 등에서 이젠 의원들을 만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김태식의원)
재력이 뒷바침 되거나 애초에 기업인으로 출발한 의원들을 빼고는 이같은 상황은 대동소이하다. 때문에 일부 돈 없는 의원들 사이에서는 어려워진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 자구노력도 시도되고 있다. 그동안 법엔 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잘하지 않았던 후원회 구성에 야당의원들도 관심을 한층 높이고 있는 것이다.
『기명후원자 2백명과 무기명을 포함해 5백명의 후원회를 계획중이에요. 월평균 1인당 2만원의 자금이 들어올 것 같습니다. 구성원들,특히 의사·회사원 등을 만나 보니 반응이 무척 좋아요.』(이해찬의원)
신계윤의원이 지난 10일 국회식당에서 연예인들의 디너쇼를 가졌던 것처럼 「후원회의 밤」행사 같은 방식이 여야의원들의 새로운 자금모금 방식으로 정착될 가능성도 엿보이고 있다.<이상언·박영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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