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테크너스릴러」해외번역소설 국내 서점가 휩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미국 대법원 판사2명이 같은날 두시간 사이에 차례로 살해된다. 프로 살인청부업자의 소행이란 것 외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어 사건은 오리무중에 빠진다. 법과대학원에 재학중인 미모의 여학생 다비는 이 사건에 흥미를 느끼고 나름대로 조사한 후 변론서(브리프)를 작성한다. 법대생이 설익은 법률지식을 토대로 작성한, 얼핏보면 말도 안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 브리프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하나 둘씩 살해당한다.
존 그레셤의『펠리컨 브리프』는 한번 손에 잡으면 쉽사리 놓을 수 없는 매력을 갖고 있다. 변호사 출신이라는 작가의 경력을 반영하듯 탄탄한 법률지식이 토대가 되어 작품의 현실성을 높이고 있을 뿐 아니라 눈부신 사건전개로 독자의 관심을 빨아들이는 흡인력도 대단하다. 국내에서도 그의 작품 인기는 대단해『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펠리컨 브리프』가 연달아 히트를 기록했다.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듯이 최근들어 그레셤 외에도 로빈 쿡의『코마』『바이탈 사인』, 마이클크라이튼의『라이징 선』『안드로메다 스트레인』등 이른바 테크너 스릴러 계열의 번역소설들이 20여종이나 쏟아져 나와 서점가의 전반적인 불황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테크너 스릴러란 첨단의 과학지식이나 전문기술이 작품의 소재가 되는 추리소설로서 종래의 추리소설이나 모험소설이 보여주던 주인공의 비현실적인 초인적 묘사를 탈피한 점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국내에 테크너 스릴러의 인기를 확고히 굳혀준 작품으론 아무래도 마이클 크라이튼의『주라기공원』을 빼놓을 수 없다.
30만부가 팔렸다는 이 소설은 가위 국내 테크너 스릴러붐의 원조대접을 받고 있다. 테크너 스릴러들이 국내 독자들에게도 이처럼 높은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어디 있을까. 우선 이 작품들이 「문화상품」으로서 높은 시장가치를 획득할 수 있었던 원인은 그 발상의 기발함과 그것에 상당한 수준의 현실성을 부여할 수 있는 작가의 전문지식에 있다.
예전의 대중소설들이 흔히 뛰어난 아이디어에도 불구하고 이를 포장할만한 지식의 뒷받침이 없어 그야말로 황당한 결말로 치달았음에 비해 이 소설들은 전문가가 아니면 쓸 수 없는 디테일의 치밀한 묘사로 충분히 그럴싸하다는 독자의 반응을 끌어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또한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빠른 장면전환을 보여준다는 것도 젊은 독자들을 끌어들이는데 크게 기여하고있다. 영상매체의 압도적인 영향력하에서 문화적 감수성을 키운 신세대 독자에게는 장황한 상황묘사가 그다지 미덕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읽을거리로서의 매력에도 불구하고 테크너 스릴러들이 암암리에 제시하는 주제는 그리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무엇보다도 과학기술의 신비화라는 경향은 우려할 만 하다. 스피디한 사건전개와 액션의 적절한 삽입 등 영화를 방불케하는 형식도 독자의 주체적 개입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문제점을 제기한다. 독자는 냉정하게 소설속의 상황을 반추할 여지도 없이 이국적인 모험의 세계에 매몰돼버리고 마는 것이다. <임재철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