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여름정치의 수도, 베이다이허 부활하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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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08면

덩샤오핑은 건강 이상설이 나돌 때마다 베이다이허에서 수영하는 모습을 공개해 건재를 과시했다. 84세이던 1988년 베이다이허에서 둘째딸 덩난과 함께 해수욕을 즐기는 덩샤오핑.

베이다이허 회의가 관심을 모으는 건 그 특수성 때문이다. 베이다이허는 중국 여름 정치의 수도(夏都, 夏宮)로 불린다. 중국의 지도자들이 매년 여름 베이다이허에 모여 국사를 조율하는 방법으로 반세기 가까이 중국의 운명을 결정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17차 당 대회가 가을로 예정된 올해처럼 중요 정치행사를 앞둔 시점에서 베이다이허 회의에 쏠리는 관심은 세계적 차원이 된다. 급속히 덩치가 커진 중국의 행보가 세계에 미치는 파장 때문이다.

베이징에서 동쪽으로 279㎞ 지점에 위치한 허베이(河北)성의 베이다이허. 이곳을 처음 찾은 중국 영도인은 인민해방군 10대 원수(元帥) 중 하나인 주더(朱德)다. 1949년부터 매년 여름 베이다이허를 찾아 휴식을 즐겼던 주더는 죽으면 이곳 산에 묻히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베이다이허를 사랑했다.

베이다이허에서 휴식과 함께 일을 할 수 있도록 제도화된 것은 53년부터다. 당시 당 중앙은 특별소조를 구성해 휴가와 근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몇 곳을 조사했다.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과 산둥성 칭다오(靑島)도 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베이다이허가 낙점을 받았다. 백사장 모래가 작고 둥글며 부드러워 최상급이라는 평가가 따랐다. 바닷물이 맑은 데다 해안의 수심 또한 완만하게 깊어져 수영하기에도 적합
했다. 특히 상어 출몰이 적어 안전하다는 점이 한몫했다. 교통도 가깝고 편리했다.

마오쩌둥이 1958년 8월 17일 개막된 베이다이허 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큰 사진). 회의에서 결정된 인민공사 설립 사항을 전하는 1958년 9월 10일자 인민일보.

54년엔 '베이다이허 여름철 공작위원회'가 설립돼 영도인들의 휴양을 겸한 근무를 본격적으로 지원하게 됐다. 베이다이허가 명실상부한 중국 여름 정치의 중심이 된 것이다. 그해 베이다이허 이용 인원은 3만6800명, 당 중앙 영도인은 30명에 달했다.

베이다이허 회의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58년이다. 8월 17일부터 30일까지 열린 회의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은 40개 항을 결정했는데 이 중 세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는 대약진 운동. 57년 534만t에 그쳤던 강철 생산량을 58년엔 두 배인 1070t으로
늘리자며 농업과 공업 생산에서의 대약진을 부르짖었다. 이는 57년 11월 마오가 향후 15년 이내에 강철 등 주요 공산품 생산에서 영국을 추월하자고 외쳤던 주장의 연속선상에서 나온 정책이었다. 둘째는 중국의 전통적인 가족 제도를 해체한 인민공사 설립, 셋째는 대만에 속한 진먼다오(金門島)에 대한 포격 결정이었다.

그러나 잃어버린 10년이란 문혁(文革) 기간엔 베이다이허 회의도 중단됐다. 베이다이허 회의를 부활시킨 것은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덩은 7월 말께 손자들을 데리고 베이다이허로 갔다가 자신의 생일(8월 22일)을 전후해 베이징으로 돌아오곤 했다. 덩은 89년 6·4 천안문(天安門) 사태가 터졌을 때도 베이다이허를 찾아 휴식과 일을 함께 하는 여유를 보였다. 건강 이상설이 나돌 때는 베이다이허에서 수영하는 모습을 공개해 소문을 잠재우기도 했다. 덩이 마지막으로 베이다이허에 간 것은 92년이었다. 의사는 수영을 금했으나 덩은 이를 무시하고 바닷물에 뛰어들었고, 그 결과 이듬해부터 덩의 베이다이허행은 불허됐다.

베이다이허를 찾는 중국 영도인들은 크게 다섯 부류다. 정치국원 등 당 중앙 간부, 국무원 고위 간부와 각 성·시 지도자, 군인인 중앙군사위원회 간부,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 위원, 정협 위원 등이다. 여기에 은퇴 원로들이 가세한다. 베이다이허에서 중국 영도인들의 활동은 보통 세 가지로 나뉜다. 외빈 접견과 회의 개최, 그리고 중대 정책 조율이다.

중국 정가에 밝은 소식통들에 따르면 보통 오전 9시나 10시쯤 회의가 시작돼 11시30분에 오전 회의가 끝난다. 오후 회의는 통상 3시나 4시에 시작한다. 저녁엔 영화를 보는 등 오락 시간을 갖는데 과거 마오쩌둥 시절엔 무도회가 많이 열렸다. 공안부장을 지낸 뤄루이칭(羅瑞卿)의 딸 뤄뎬뎬(羅点点)의 회고에 따르면 여느 간부들이 점심 시간에 바다를 찾는 데 비해 마오는 오후 서너 시에 해수욕을 즐기곤 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펑더화이(彭德懷)만큼은 베이다이허에서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고 한다.

베이다이허 회의 개최 방식과 관련, 지도부 구성 등 중요 안건이 있는 해에는 정치국 전원과 원로들이 참석하는 정치국 확대회의를 연다. 그러나 통상적인 해에는 중앙위원 주축의 당 중앙 공작회의를 개최한다. 사안에 따라 각 성의 서기나 성장 등 관계 인사가 참석한다. 58년 베이다이허 회의 폐막식엔 300명이 넘는 인사가 참석했다.

베이다이허 회의의 특징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두 비교적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한다. 그러나 타협을 추구해 당내 의견을 통일하는 게 목표다. 보통 정치국 상임위원 등 최고 지도부 몇 명이 정책에 관한 큰그림을 잡고, 이를 아래 단계에 있는 고위 간부들의 회의를 거쳐 구체화하는 모양새다.

옛 소련 해체 서막을 알린 91년의 소련 쿠데타 발발 때는 베이다이허 회의가 비상 지도부 회의 역할을 대신했다. 후진타오를 4세대 지도자로 확정한 것 또한 2002년 여름 베이다이허 회의에서였다.

그런 베이다이허 회의가 돌연 중단된 것은 후진타오가 국가주석에 오른 2003년 여름부터다. 베이징 정부는 더 이상 베이다이허에서 여름 근무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 외신은 후 주석이 원로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취한 조치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형식보다는 실리를 중시하는 후 주석의 통치 스타일에 따른 것이란 분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 베이다이허에서 일을 하려면 지도자급 인사 1명당 수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의 부하 직원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비용 지출이 크다. 특히 그해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SARS)이 중국을 강타하는 등 비상 시국에서 지도자들의 호화 휴식은 안 된다는 판단이 따랐을 것으로 본다.

지난해 8월 초 중국의 일부 경제 전문가들이 베이다이허에서 회의를 개최해 한때 베이다이허 회의가 부활된 게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그러나 최고 지도자가 참석하는 과거와 같은 베이다이허 회의는 아니었다. 중국은 영도인들의 개별적인 베이다이허 휴양은 인정하지만 아직도 공식적인 베이다이허 회의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올해 들어선 상하 의견을 은밀하게 조율하는 베이다이허 회의의 순기능이 부각되고 있다. 17차 당 대회가 코앞에 닥쳤기 때문이다. 두 가지 사항에 대한 의견 통일이 필요하다고 한다. 첫째는 중국 최고 지도부인 정치국 상임위원 인선에 대한 조율이다. 둘째는 17차 당 대회에서 후 주석의 노선인 과학적 발전관과 조화(和諧)사회 건설을 어떻게 정리할 것이냐의 문제에 대한 협의다. 중국의 미래가 달린 문제다.

아직도 장쩌민(江澤民) 계파의 견제에서 자유롭지 않은 후 주석 입장에선 그 어느 때보다 타협이 필요한 시점이며, 이 같은 타협을 위해선 휴식을 구실로 자연스러운 만남을 제공하는 베이다이허 회의만큼 좋은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올해는 베이다이허 회의가 다시 열리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올여름 세계의 시선이 베이다이허에 쏠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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