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박현령 시인 '思夫曲' 시집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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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시인 박현령(朴賢玲.66)씨가 4년 전인 2000년 3월 당뇨병으로 세상을 뜬 남편 허규(전 국립극장장)씨를 추모하는 봉헌시집 '대청마루에 북을 두고'(경원 미디어)를 최근 펴냈다.

박씨가 허씨를 기리는 책을 출간한 것은 1주기 때 여석기.최불암.손진책.김성녀씨 등 연극계 60여명의 추모글을 모은 산문집 '허규를 그리며'를 엮어낸 후 이번이 두번째다.

두 사람은 같은 일을 하는 직장동료로 처음 만났다. 1962년 KBS에서 허씨가 드라마를 연출할 당시 박씨는 여성교양 프로그램을 만드는 동료 PD였다. 이듬해 결혼한 두 사람의 행로는 70년대 초 허씨가 민예극장을 만들고 대표직을 맡아 연극에 뛰어들면서 갈렸다.

허씨는 77년 한국 마당극의 효시인 '물도리동'을 연출, 대한민국연극제 대통령상을 받은 후 '마당극의 대부'로 자리잡았고 93년 북촌창우소극장을 만들기도 했다.

이제는 남편의 기억을 떠올리며 담담할 법도 한데 박씨는 여전히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의 재목이었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67세의 나이는 세상을 떠나기에는 너무 아까운 나이다"라고 남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

시집에 실린 시들은 박씨가 혼자된 아픔을 삭이며 힘들게 써내려간 상처의 기록들이다.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박씨는 "남편이 세상을 뜬 후 2년까지는 문예지들에서 시 원고 청탁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남편을 그리는 시들이 나왔다"고 고백했다. '대청마루에…'에는 그렇게 모아진 시들에 신작 10여편을 합친 43편이 담겨 있다.

"한달에 한번씩 은행에 가면/그가 거기에 살아 있다/은행원이 남편의 이름을 부르고/내가 그의 통장에/신용카드 쓴 값을 입금시킨다"('한달에 한번 은행에 가면' 중)는 구절이나 "매달 그의 이름으로/홈쇼핑 카탈로그가 배달되어온다."('홈쇼핑 고객명단 속에서는' 중) 같은 대목을 보면 남편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박씨의 삶 속에 살아있다.

"드디어 의사가 말한다./어디선가 막혔다고,/막힌 곳을 빨리 뚫어주지 않으면/죽음의 나라 문이 열리고/그곳에 등록하러 가야 한다고."('죽음의 나라 등록' 중) 같은 구절이나 "그가 물소리를 내고 약 먹는 것으로/그가 살아있음을 감사하면서"('그의 방 2' 중) 같은 구절은 다름 아닌 간병기다.

시집 제목도 생전 북(鼓)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남편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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