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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탈관직(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0여년전 서울에서 이른바 「대도사건」이 일어났다. 간 큰 도둑이 고위층인사의 집만을 골라 값진 것을 털어갔다. 그가 훔친 물건가운데는 높은 수익성을 보장하는 무기명 장기채권이 뭉터기로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 채권은 당시 대국민 경제교육에 열을 올리며 은행저축을 호소했던 어느 장관 집에서 나온 것이다. 실명제도입이 검토되고 있던 시점에서 드러난 그 장관의 재테크 수단은 두고두고 화제거리가 됐다. 장관의 치부과정이나 도덕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여론도 있었으나 5공초기의 억압적인 상황은 이를 완전 묵살했다.
공직자들의 축재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국민의 분노대상이 되었다. 고려와 조선왕조에도 숱한 탐관오리들이 삭탈관직되었으나 임금이 나라일을 돌보지 않아 시대가 어지러워지면 마구 재물을 탐하는 관리들이 또 들끓었다. 축재한 관리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 명부인 사판에서 아예 이름을 깎아버리는 삭탈관직은 한 가문의 파멸을 의미하는 가장 엄격한 징벌이었으나 그것만으로 부정이 뿌리뽑히지 않았다.
청나라 건륭제의 권신이었던 화곤은 중국의 대표적인 부패관리로 꼽힌다.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가마꾼으로 일하다가 어느날 황제의 눈에 띄게 되고 임관한지 불과 10여년만에 최고위직인 군기대신(국무총리)에까지 이르렀다. 그의 권세가 극에 달한 것은 황제의 딸을 며느리로 삼을 때였으나 황제가 죽자마자 그는 부패관리로 지목돼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의 재산은 무려 국가 세입의 11배를 넘을 정도의 엄청난 것이었다.
어느 조직이나 기강을 바로 잡기위해서는 우선 부패한 사람을 솎아내는 숙청부터 시작되었다. 중세기 십자군의 초기원정이 성공한 것은 오직사건을 가차없이 처리해 전력을 다졌기 때문이다. 십자군안에 십자군전사 즉,경세가를 집어넣어 부패의 유혹을 차단하는데 공헌했다. 도덕적 기준을 지키지 못하는 십자군은 목숨을 잃었다. 요즘 축재과정에서 물의를 일으켜 현직에서 물러나는 정치인 및 공직자들이 뉴스의 초점이 되고있다. 삭탈관직만으로 개혁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부패추방운동에 앞장선 사람들이 정직하고 청렴해야 국민의 힘을 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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