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쓰기 "거센 물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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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새내기 여러분을 모시고 다음과 같은 일로 회의를 갖고자 합니다.
얘기할 일 ‥ 댓거리·배움거리 정하는 일과 모꼬지가는 일
때 ‥ 다음주 물요일 늦은3시
곳 ‥ 동아리방」
연세대 학생회관 2층계단에 붙어 있는 어느 동아리(서클)의 모임공고다. 90년대 이전에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라면 이 공고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할 것이다.
새내기가 신입생, 물요일이 수요일이라는 것쯤은 짐작함 수 있지만 댓거리가 세미나, 배움거리가 커리큘럼, 모꼬지가 MT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없다.
요즘 대학가에선 일반인들은 거의 해독(?)할 수 없는 이런 우리말들이 당당히, 그리고 활발하게 쓰여지고 있다.
주로 대자보·공고문에서 보여지는 이런 말들은 거의 사장돼가던 순수 우리말을 부활시켰거나 대학생들의 감각에 맞게 재치있게 새로 지어낸 말들.
댓거리란 「상대하다,대들다」 라는 말에서 나왔고 모꼬지란 「놀이·잔치등의 일로 여러 사람이 모임」 이란 뜻의 순수 우리말이다.
이밖에도 배움터 (캠퍼스)· 맏사내 ( 예비역)· 모람 ( 동아리의 회원 )· 해오름식 (출정식)· 새내기배움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 등이 의래어나 한자어를 대신하고 있다.
대학생들의 우리 말 쓰기 운동은 80년대 중반부터 활발하게 시작된 각 대학 한글사랑 동아리들의 활동에서 비롯됐다.
외래문화 홍수 속에서 주체성을 찾자는 언어민족주의 의식과 자기들만의 문화를 자기들만의 독특한 언어로 표현하고 싶어하는 「하위문화」 (sub-culture) 의식이 결합해 토박이말 쓰기가 대학가에 급속치 퍼지게 된 것.
현재 대학가에서는 서울대 「말과 껍데기」, 건국대「한말글사랑터」등 전국의 대학 한글사랑 동아리들이 연대해 외래어 간판조사· 교내 길이름 짓기등의 실천운동을 펼치고 있다. 지금까지 한글사랑 동아리들이 발굴해낸 용어로는 날적이(일기)·해적이(연감)·으뜸빛 (동아리회장)·버금빛(부회장)·다사랑 (지도교수) 등으로 이런 말들도 언젠가는 「언어의 시민권」을 획득하리라 예측되고 있다.
대학가의 이런 우리 말쓰기 바람에 대해 경희대서정범교수(국문과)는 『범람하는 외래어 시대속에서 우리말찾기운동은 문화 주체성 확립이란 면에서 입단 바람직한 것』이라면서도 하런 말들이 대학생들의 또하나의 은어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의사소통도구로서의 사회적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현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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