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만으론 못고칠 「금융병」/양재찬경제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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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언제부턴지 우리는 「사정한파」라는 말을 한 단어로 쓰고 있다. 그러나 사정의 참뜻을 생각하면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사정이란 문자 그대로 그릇된 일을 바로잡는 일이다. 따라서 잘못된 부위는 정확히,과감하게 도려내야 하지만 몸전체가 열병을 치르게 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평상시 열심히,제대로 일해 오던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의욕을 갖고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지 움츠러들게 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사정은 한파가 아닌 「온풍」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두명의 은행장이 사표를 내면서 금융계에 몰아닥친 사정 분위기를 보면 이와는 정반대다. 일부 은행직원들은 점심시간에 밖에 나가 점심먹는 것까지 조심스러워 하고,예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거래선 만나는 것까지 꺼릴 정도다. 은행장에 이어 곧 전무·감사 등 임원 몇명이 더 옷을 벗을 거라는 흉흉한 소문도 나돌고 있다.
이같이 금융계의 긴장을 증폭시키는데 정부는 단단히 한몫을 했다. 금융계를 사정한다면서 금융감독의 수장인 은행감독원장 자리를 10여일 비워 놓았으며 국책은행장 인사도 함께 미루고 있다. 수천명의 직원을 대표했던 은행장 두명이 물러나는데 그 이유에 대한 설명조차 없었다.
물러나는 두 은행장은 「건강」과 「개인사정」을 사임이유로 내세웠다. 그러나 불과 한달전 정기주총때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인물들이라 아무래도 뭔가 은밀하고 대단한 사정활동이 작용한 것에 틀림없다. 이같은 행태는 새정부가 내세운 경제3원칙중 하나인 「투명성」과 배치된다. 그 이유를 밝히는 투명한 사정이어야 경제활성화가 무엇보다 강조되는 요즘 금융계에 미치는 나쁜 부작용을 줄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금융계에는 최근 유달리 투서가 많은데 이중 9할이 무기명이며,그 무기명 투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번 알아보는 경우」가 있다고 한 관계자는 전하고 있다. 무기명 투서가 무시되는 원칙이 지켜져야 대다수의 선량한 금융인이 마음놓고 일할 수 있다.
결국 금융부조리의 가장 근본적인 치유방안은 금융자율화다.
누구나 자기 뜻에 따라 예금하고 정상적인 돈값으로 빌려가면 사가 끼어들 소지가 줄어든다. 사정만으로 다스리는 데는 한계가 있으므로 스스로 잘 커나갈 수 있는 환경조성이 사정의 대전제가 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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