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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규 칼럼] 대통령님만 믿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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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나라 경제를 꾸려가는 데 대통령의 힘은 얼마나 센 걸까. 이승만은 자본주의 경제의 틀을 놓은 건국대통령, 박정희.전두환은 자타가 인정하는 경제대통령. 물통령이라던 노태우를 거쳐 김영삼은 얼떨결에 금융실명제 도입 같은 엄청난 일을 해치웠는가 하면, 김대중은 소소한 통계까지 줄줄이 꿰면서 관계장관들을 쥐락펴락했다. 업적 불문하고 모두가 막강한 권력으로 경제를 좌지우지했었다. 개도국의 공통점일 게다.

노무현 대통령은 어떤가. 그는 경제 쪽에서도 '낮은 대통령'을 자임하면서 대통령의 직접통제 포기를 선언했다. 청와대 경제수석 자리를 없앤 것도 경제장관들더러 청와대 눈치보지 말고 소신껏 하라는 뜻이었다.

*** '노무현式'에 기겁하는 기업인

대통령의 독단을 스스로 경계하면서 참여와 민주적 절차를 누누이 강조했다. 주제별로 집단토론을 즐겼고, 셔츠 차림에 참모들과 스스럼없이 개비담배도 나눠 피우고 종이컵 커피도 직접 따라 마시는 신선한 모습을 연출해냈다. "야, 정말 달라졌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웬걸. 그는 시작부터 헐크 같은 무서운 위력을 발휘해 나갔다. 자신의 코드에 맞는 인물들을 요직과 측근에 확실하게 포진시키면서 나라 운용의 틀 자체를 단숨에 뒤엎었다. 쩨쩨하게 은행장 인사개입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평소 하고 싶었던 대로, 그리고 자신을 지지했던 세력들의 주장을 십분 반영시켜 기존의 경제운용 틀을 과감하게 바꿔나갔다.

노무현식 경제정책을 강력히 펼쳐 나갔다. 호통을 쳐가며 장관들에게 자신의 신조와 철학을 강의했다. 신(新)교조주의라 할 만했다. 대통령의 단호함에 꼼짝도 못했다. 수도 이전은 어느새 기정사실처럼 돼 버렸고 반대 목소리는 곧바로 반(反)개혁으로 간주됐다. 노조의 불법행위에 공권력 동원 여부는 대통령 재가사항이 돼 버렸는가 하면, 사패산터널 문제는 자신의 백지화 선거공약을 무마하느라 5천억원짜리의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했다.

참모들이 성에 안 차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새판을 짜나갔다. 이 통에 기업인들은 지난 한해 새 대통령한테 혼쭐이 났다. '노무현식'이라면 기겁을 한다. 해서 그를 역대 대통령 중에 반(反)기업정서가 가장 강한 대통령으로 꼽는다. DJ더러 기업 사정을 몰라준다고 야속해 했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땐 아무 것도 아님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잘잘못을 떠나 기업들의 위축현상은 당연한 결과다.

盧대통령의 과거가 워낙 공격적이어서 기업들이 지레 겁먹는 측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변호사 시절부터 노조 편에서 기업들의 과오와 약점을 매섭게 꾸짖고 파헤쳐 왔던 데다, 집권 초장부터 확실하게 노조 손을 들어줬으니 말이다.

경제정책을 끌어가는 관료들도 무척 당황했다. 거시경제 운용이니 생산성 10% 높이기 따위의 슬로건은 명함도 못 내밀었다. 노사분규도, 원전 문제도, 심지어 카드 부실 문제까지도 경제 문제가 아니라 국민통합적 차원에서 다스려야 할 사회갈등 문제로 인식됐다. 종래의 경제정책을 기준한다면 그런 경제정책은 새 정부에 없었다. 돌이켜 보면 盧대통령만큼 취임 첫 해에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자기 색깔을 강하게 부각시킨 대통령도 일찍이 없었다. 배짱대로 했고, 사람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쓰고 싶은 대로 썼다. 그리하여 자신도 시인했듯이 시행착오도 많았다.

*** 카드부실도 사회갈등 문제인가

올해 경제는 어찌될까. 기업인.공무원 할 것 없이 대통령을 쳐다보고 있다. 한국 경제는 여전히 대통령 하기에 달렸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후진적이고 부끄럽지만 우리의 현실이요, 수준인 걸 어쩌겠나. 여전히 대통령이 한마디 하면 알아서 기는 풍토.조직.관행이 한국 경제의 어쩔 수 없는 인프라다. 아무리 좋은 제도나 시스템을 갖춰도 대통령의 생각이 안 바뀌면 헛일이다. 더구나 개혁이란 구호 아래 워낙 기세좋게 밀어붙여 놔서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무르지 않고서는 궤도 수정이 불가능한 정책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악순환을 단절시킬 사람은 대통령밖에 없다. 그가 주도했던 일만 제대로 추슬러도 올해 경제는 훨씬 좋아질 것이다. 그것들이 무엇인가는 盧대통령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대통령의 경제인식이 어떻게 달라지느냐가 올해 경제의 핵심이다. 정말 대통령님만 믿습니다.

이장규 경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