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금리인상 팔 걷은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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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18면

신인섭 기자

12일 오전 10시30분. 금융통화위원회 회의가 시작된 지 1시간 반이 지났지만 콜금리 결정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금통위가 이렇게 시간을 끌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한국은행 기자실은 술렁였다. “격론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한데, 예상 밖으로 금리가 동결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주식시장도 기다림에 지치는 듯했다. 이날 아침 25포인트 이상 급등했던 코스피지수는 상승폭을 15포인트 정도로 좁히고 있었다.

“나는 5년 뒤 평가받고 싶다”

같은 시간 한은 15층 금통위 회의장. 금통위원들은 일찌감치 콜금리를 4.75%로 0.25%포인트 올리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반대 의견은 소수에 그쳤다. 하지만 금통위 발표문을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금리 추가 인상의 시그널을 시장에 분명히 전달하자’는 견해와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으냐’는 입장이 맞섰다. 금통위 의장인 이성태 한은총재가 나섰다. 이 총재는 ‘시장과의 대화’ ‘예측 가능한 통화정책’을 강조하며 신중론을 펴는 위원들을 설득했다.

결국 이날 금통위 발표문에는 “인상 조정된 콜금리 목표는 여전히 경기회복을 뒷받침하는 수준인 것으로 판단됨”이란 문구가 들어가게 됐다. 현재 국내 경기가 상승기조를 이어가고 있음에도 콜금리는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였다. 이는 금리를 더 올리게 될 것이며, 경기상승 속도에 따라 그 폭은 계속 커질 수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금통위의 이런 결정은 오전 10시37분 언론을 통해 타전됐다. 증시에는 악재로 받아들여질 사안이었다. 그러나 주가는 이내 상승폭을 키워 한때 30포인트 이상 폭등했다.

한은이 경기상승을 확인하는 동시에 금리정책의 불확실성을 제거해주었다는 점을 시장은 오히려 반겼다는 해석이 잇따라 나왔다. 외환시장과 채권시장도 별 충격 없이 안정된 흐름을 보였다. 한 금융계 인사는 “이 총재가 한달 전 ‘빠른 유동성 증가 속도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한 뒤 콜금리 인상에 대비해 왔다”며 “7월 콜금리가 동결됐다면 시장은 오히려 혼돈스러워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5시 한은 집무실로 이 총재를 찾았다. 그의 얼굴은 밝았다. “시장의 반응이 좋다”고 덕담을 건넸다. 이 총재에게서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외환위기를 맞은 지 2년도 안 된다. 1999년에 김대중(DJ) 정부는 IMF위기 탈출을 선언했어요. 주가가 좀 오르고 일부 경기지표가 호전되자 들떴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뒤 경제는 어떻게 됐나요… 어떤 정책이 잘됐는지 안 됐는지는 5년 정도 기다려봐야 압니다. 5년쯤 지난 뒤 ‘한은이 그때 참 좋은 결정을 내렸어’라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그동안 한국은행이 특유의 소심함과 정부·정치권의 압력 등으로 좌고우면(左顧右眄)해왔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통화정책 실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시장을 향해선 좌회전 깜박이를 보내고는 우회전해버리는 깜짝쇼를 벌이기도 했다. 이 총재의 발언에선 이에 대한 반성과 변신의 의지를 읽어볼 수 있었다.

“이번 콜금리 인상이 (증시과열을 걱정한) 청와대를 의식해 나왔다는 시각도 있지 않느냐”고 물어 봤다.

“금리 결정을 위해선 다양한 의견을 경청해야 합니다. 청와대도 나름의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재계는 재계대로 환율 등을 이유로 금리인상 반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습니까. 금통위는 가급적 많은 의견을 듣되 최종 결정은 중심을 잡고 내릴 따름입니다.” 이번 금리결정은 철저히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는 얘기였다. 이 총재를 아는 사람들은 충분히 그럴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총재는 한은에서 소신을 버리지 않는 원칙주의자, 치밀한 이코노미스트로 통해왔다. 2004년 11월 금통위 회의 때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박승 한은 총재를 비롯한 대다수 금통위원은 경기하강을 이유로 콜금리 인하를 논의했다. 하지만 당시 이성태 한은 부총재는 직속 상관인 박 전 총재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경기부양 효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부동산시장 과열 등 부작용만 키울 것이란 이유에서였다. 결국 이 총재의 판단이 옳았음이 얼마 되지 않아 확인됐다.

지난해 4월 한은 총재로 취임한 뒤 6월과 8월 두 차례 콜금리를 올릴 때는 ‘경기가 이 모양인데 도대체 제정신인가’라는 비판이 정부와 재계에서 쏟아졌다. 하지만 그 뒤 국내 경기는 한은의 예측대로 연착륙했고, 부동산 시장도 점차 고개를 숙였다.

한은의 고위 관계자는 “앞으로 이 총재의 진가가 발휘될 테니 한 번 두고보라”고 말했다. 그는 설명은 이랬다. “그동안 경기가 하강하는 바람에 이 총재 운신의 폭이 좁았다. 콜금리가 11개월이나 묶여 있었다. 하지만 이제 경기가 좋아지고 있지 않은가.

이 총재는 경기와 자금 흐름의 맥을 짚는 데는 국내 최고의 베테랑이다. 시장은 이 총재와 교감하는 재미에 빠지게 될 것이다.” 고기가 드디어 물을 만났다는 얘기다.

이 총재는 1년3개월 전 취임 때 세 가지 포부를 밝힌 바 있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통화정책, 시장친화적인 통화정책, 경제 전반을 감안한 통화정책 등이 그것이다. 이 총재가 이런 뜻을 펼쳐볼 여건이 무르익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정부의 경제정책이 표류할지도 모를 상황이다. 이럴 때 한은이 중심을 잘 잡아준다면 시장이나 기업이나 한결 편할 것이다.

이 총재는 “지금 가장 큰 걱정은 기업 투자”라고 말했다. 콜금리를 더 올리더라도 행여 기업들의 투자의욕을 꺾는 일이 없는지 세심히 살피겠다고 했다. 그는 투자를 가로막는 각종 정부 규제가 시원스레 풀리지 못하고 있는 점을 아쉬워했다.

이 총재에 대해 좋은 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은이란 조직의 이해에 너무 집착한다는 비판이 그중 하나다. 최근 자본시장통합법 제정 과정에서 증권사에 대한 소액 지급결제 허용 문제를 집요하게 걸고 넘어가, 결국 증권사에 대한 검사권을 확보한 것은 제 밥그릇 챙기기에 치중한 행보였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 총재의 희망대로 5년 뒤쯤 그가 ‘한국의 그린스펀’으로 평가받기 위해선 통화정책을 잘 펴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한은의 조직 이기주의와 보신주의를 앞장서 깨는 혁신 노력을 병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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