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뛰는 러시아 과학의 '심장'-노보시비르스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8호 12면

과학연구단지 ‘아카뎀고로독’. 멀리 정면으로 유명한 핵물리학 연구소가 보인다.

Novosibirsk 노보시비르스크

26일 밤 이르쿠츠크를 출발한 열차가 35시간을 쉴 새 없이 달려 ‘러시아의 심장’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했다. 광대한 러시아의 정중앙에 위치한 도시다.
‘새로운 시베리아 도시’라는 뜻을 가진 노보시비르스크는 모스크바·페테르부르크에 이어 러시아에서 셋째로 큰 도시다. 150만 명의 인구에 시베리아 도시 가운데 유일하게 지하철이 깔려 있다. 1890년대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 과정에서 도시의 모습을 갖췄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우랄산맥 서부 지역에 있던 산업시설들이 나치의 침공을 피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급성장했다. 지금도 항공기·전기제품·의료장비 등을 생산하는 각종 산업시설이 집중돼 있다. 러시아의 동쪽과 서쪽은 물론 남쪽 중앙아시아까지 연결하는 교통의 허브 역할도 맡고 있다.

‘아카뎀고로독’부터 찾았다. ‘작은 연구 도시’ 정도로 해석되는 아카뎀고로독은 러시아 최대 과학연구단지다. 연구소와 연구보조시설 수백 개, 기숙사 및 아파트로 이루어진 작은 도시다. 동서 냉전체제와 우주개발 경쟁이 불붙기 시작하던 1957년 흐루시초프의 지시로 만들어져 미국과의 과학기술 경쟁을 이끄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대전의 대덕연구단지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연구단지는 노보시비르스크 남쪽 30여㎞에 자리 잡고 있다.
도심을 벗어나 40여 분을 갔을까. 버스가 갑자기 숲 속으로 난 길로 접어들더니 한참을 더 달린다. 길 옆으론 전나무와 자작나무·소나무 등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과학연구단지를 간다면서 왜 이런 깊은 숲으로 들어가나 의아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버스가 멈추더니 내리라고 한다. 목적지에 다 왔단다.

첨단기술과 고급두뇌가 밀집한 지역이라 출입 절차가 까다롭고 경비가 삼엄할 것으로 여겼던 내 예상은 빗나갔다. 외국인이 탄 우리 버스를 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거진 숲 사이사이로 연구소와 아파트 건물이 들어선 단지는 한가로운 전원도시 같았다. 쇼핑몰과 극장·식당 등의 편의시설도 단지 안에 있다. 현재 연구원과 그 가족 등 6만여 명이 생활하고 있단다.

아카뎀고로독에서 멀지 않은 철도 박물관에 전시된 기관차들 ,러시아 최대의 오페라·발레 극장

숲길을 빠져나오자 대로변에 4~5층 연구소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지나가는 중년 남자에게 다가가 어떤 연구소들이냐고 물으니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지질학 연구소·유전학 연구소·핵물리학 연구소 등등. 옛 소련 시절 폐쇄지역이었던 이곳이 지금은 외국인 관광지가 됐다고 한다. 수상하게 여길까 봐 조심스레 물어봤던 내가 오히려 무안할 지경이다.

아카뎀고로독은 소련 시절 상당한 특권을 누렸다. 다른 지역과 달리 생활물자가 넉넉히 공급됐고 월급도 적지 않았다. 학자들은 연구에만 몰두하면 됐다. 하지만 91년 소련이 무너진 뒤 모든 것이 변했다. 정부 지원 축소로 연구소들이 살림을 꾸려가는 것조차 힘든 형편이 되면서 많은 학자가 서방으로 떠났다. 남은 학자들도 생계를 위해 부업거리를 찾아나서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다 최근 러시아 정부가 미국의 실리콘밸리에 맞먹는 정보기술(IT) 산업 중심지로 만들려는 계획을 발표하고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면서 예전의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단다.

아카뎀고로독을 떠나 노보시비르스크 시내로 돌아가는 길에 철도박물관이 있다. 모스크바·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철도박물관에 이어 러시아에서 셋째로 큰 규모다. 운동장처럼 넓은 야외 공간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야전병원으로 이용되던 기차, 눈 치우는 기차, 레일을 까는 기차 등 특수 열차들이 나란히 전시돼 있다. 50~90년대에 제작된 기관차들도 모두 모아놓았다. 과연 기차의 나라다.

시내로 돌아온 뒤 방문한 레닌 광장 뒤의 오페라·발레 극장은 노보시비르스크가 산업과 과학뿐만 아니라 예술의 도시임도 실감케 했다. 2차 대전이 막을 내리던 1945년에 완공됐다는 극장은 세계적으로 손꼽힐 정도의 규모다. 2600명이나 수용할 수 있다는 극장은 크기로만 보면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을 능가한다. 극장에 소속된 발레와 오페라단 수준도 정상급이라 한다. 공연장 안으로 들어서자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수정 샹들리에 아래 붉은색 좌석들이 빼곡히 놓여 있다. 시베리아 한가운데 이런 극장이 있다니… 예술에 대한 러시아인의 열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