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후보의 4대 검증 포인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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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06면

정수장학회

미리보는 한나라당 검증 청문회, 대리인에 듣는다 #'中情 보고서'의 최태민 비리 사실인가 #

고(故) 김지태씨가 설립한 부일장학회가 모태다. 김씨는 1962년 장학회를 국가에 헌납했고, 나중에 박정희·육영수 두 사람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딴 정수장학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최근 이 문제를 “공권력에 의한 강제 헌납”이라고 결론지었다.

Q: 박근혜 후보는 정수장학회 이사장 시절(1998∼2005년) 섭외비·보수 명목으로 연간 1억∼2억여원을 받았다. 일주일에 2~3번 출근한 것치고는 액수가 많은데.

A: 문화방송·부산일보의 대주주인 정수장학회가 이사장의 급여를 두 회사 사장 정도로 맞추려는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전직 대통령 유가족의 생활을 좀 도와주려는 생각도 있었다고 본다.

대리인 김재원 의원 [신인섭 기자]

Q: 장학회 반환 문제로 논란이 있다.

A: 정수장학회는 비영리 공익법인이다. 개인 재산이 아니다. 특히 박 후보는 이사장에서 물러난 뒤 그쪽 사람을 만나거나 영향력을 행사한 일이 없다. 장학회의 앞날은 현 이사진이 결정할 문제다.

최태민 목사

최 목사(1994년 사망)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박근혜 후보와 함께 ‘구국여성봉사단’을 운영한 인물이다.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재판 과정에서 “최태민이라는 자가 사이비 목사이며 자칭 태자마마라고 하고 사기횡령 등의 비위 사실이 있는 데다 여자들과의 추문도 있는 것을 알게 됐다”고 주장했다.

Q: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이 주장한 내용은 사실인가. 박 후보도 관련이 있나.

A: 김 부장이 박 대통령에게 최 목사 관련 보고서를 올린 것은 맞다. 이를 본 박 대통령은 김 부장, 최 목사, 자신의 딸인 박 후보를 불러 ‘친국(親鞫·직접 신문)’을 했다. 그러나 김 부장은 최 목사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 누군지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박 대통령이 ‘무슨 보고서가 이 모양이냐’고 말했다는 것이다. 정권이 바뀐 뒤 신군부가 또 조사를 했다. 만일 피해자가 있었다면 유신 때는 겁을 먹고 신고를 못했다고 해도 이때는 신고하지 않았겠나.

Q: 당시 중앙정보부가 작성했다는 ‘최태민 관련 자료’라는 문건도 돌아다닌다.

A: 지금 유출된 것은 가짜라고 본다. 워드프로세서로 친 것인데 당시엔 필경사가 전부 손으로 썼다. 새로 타이핑하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이 가필된 것으로 보인다. 최 목사가 여러 차례 이름을 바꿨다는 둥, 여자관계가 어떻다는 둥 하는 것은 모두 김재규의 중정 보고서에 근거한 주장이다. 최 목사의 신뢰성을 탄핵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Q: 최 목사 가족들이 서울 강남에 부동산을 다수 소유하고 있다는데.

A: 최 목사의 딸이 강남에서 규모 1∼2위를 다투는 유명 유치원을 운영해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수백억원대 재산가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김재규 중정부장 시절에 이미 숨겨놓은 재산이 없는지 최 목사 집을 샅샅이 뒤졌다고 한다. 고추장 독까지 다 퍼냈다는 것이다. 최 목사 가족들은 96년에도 최 목사가 남긴 재산으로 부동산을 샀는지 세무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 문제가 없었고, 가족들이 이런 내용의 조사결과서까지 가지고 있더라.

Q: 최 목사의 사위 정모씨가 한때 박 후보의 국회 입법보조원으로 일한 경위는 무엇인가.

A: 박 후보가 청와대를 나온 뒤 주변 사람들이 많이 떠났다. 98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왔을 때도 도울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 당시 정씨가 자발적으로 도왔다. 그래서 그 후에 한 번씩 만나 이야기도 듣고 했던 것이 전부다. 입법보조원은 월급을 받는 정식 보좌진이 아니라 자원봉사자 개념이다.

육영재단

69년 육영수 여사가 어린이 복지를 위해 설립한 재단. 82년 박 후보가 이사장에 취임했다. 90년 내부 갈등으로 그가 물러난 뒤 동생 근령씨가 자리를 물려받았다.
 
Q: 90년 당시 재단 운영권을 놓고 박 후보 지지 세력과 동생 근령씨 지지파가 심한 갈등을 겪었는데.

A: 박 후보는 동생 지지자들이 자신을 몰아내려는 것에 충격을 받고 바로 (이사장직을) 그만뒀다. 이후 새로 들어온 분들이 모든 서류를 샅샅이 조사했지만 단 한 건도 비리를 찾아낸 것이 없었다. 다만 새 집행부가 문제를 야기해 감사에서 지적된 적은 있다.

Q: 당시 최태민 목사가 재단운영에 개입한 것이 자매 갈등의 원인이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A: 육영재단이 기본적으로 돈이 되는 사업이 아니다. 박 후보는 이사장을 하면서 월급 한 푼 받은 적이 없다. 최 목사가 전횡을 했고, 온갖 이권을 차지했다는데 이권이 있어야 차지할 것 아닌가.

영남대

47년 설립인가를 받은 대구대학과 50년 설립된 청구대학이 67년 통합돼 만들어진 학교. 두 대학 관계자의 후손들은 영남대 설립·운영 과정에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박 후보는 80년부터 88년까지 영남대학교 이사장과 이사를 지냈다.

Q: 박 후보가 영남대 이사였던 81년 영남학원 정관에 ‘교주(校主) 박정희’란 구절이 삽입됐다. 출연금을 전혀 내지 않은 박 전 대통령이 어떻게 교주가 되느냐는 주장이 제기됐다.

A: 당시 학내 소요가 심했다. 박 후보가 ‘우리 아버지 이름을 넣자’고 주장할 상황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88년 박 후보가 물러난 뒤 지금까지 왜 그 부분을 빼지 않았겠나. 당시 이사진이 학교의 설립 이념과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넣었는지는 모르겠다.

Q: 청와대를 나와 서울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던 박 후보는 82년 성북동 집으로 이사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집을 지어주라고 지시했다는 말도 있고, 박 후보가 한 기업인에게 이 집을 받고 영남대 발주 공사를 맡겼다는 주장도 있다.

A: 후자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성북동으로 이사를 가라고 해서 간 것은 맞다. 그러나 전 전 대통령의 지시였다는 등의 내용은 후보 본인이 잘 모른다. 당시 박 후보는 외부활동이 어려운 상태였다. 검증위 조사에 따르면 고 김윤환 전 의원이 중간에서 역할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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