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순 외교장관 단독 인터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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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05면

신인섭 기자

-북한 핵 시설이 폐쇄되는 의미부터 듣고 싶다.

“지금은 北에 절호의 기회 美 정권교체 땐 정책 수정”

“이제 길의 시작에 들어섰다. 그 전에는 출발선에 서기 전 규칙 등을 놓고 이야기했지만 이제 목표를 향한 출발선에 선 것이다. 2005년 (북핵 폐기 원칙 등을 담은) 9ㆍ19 공동성명 채택 후 여러 난관이 있었지만 그 사이 상당한 에너지가 축적됐다. 이 에너지 때문에 속도가 빨리 날 수도 있다.”

-다음 단계는 북한 핵 시설 불능화(disablement)와 모든 핵 프로그램의 신고다. 쉽지 않은 과제로 보이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겠는가.

“위험한 자동차를 못쓰게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있다고 치자. 아예 못쓰게 해서 주차장에 세워 두느냐, 폐차장으로 견인해 부수느냐의 차이다. 후자는 폐기(dismantle)다. 주차장에 갖다놓고 엔진을 뽑아 누구도 운전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게 불능화다. 복구하려면 돈도, 시간도 엄청나게 든다. 북·미 관계 정상화, 경제ㆍ에너지 지원을 확실한 방식으로 조기에 할 수 있으면 불능화도 빨리 될 수 있다. 정치적 의지가 중요하다. 기술적인 제약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제약 때문에 시간이 걸릴 수 있다.”

-향후 최대 쟁점은 북한이 2차 핵 위기 발단이 된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을 신고할지다. 장관께서는 이를 단순히 우라늄농축계획(UEP)으로 부르고 있는데.

“우라늄농축계획과 (핵무기 원료인) HEU는 다르다. 우라늄농축계획은 만들 수 있는 시설이나 설계도를 일컫는 것이고 그 결과물로 나온 게 HEU다. HEU는 현재 상황과 맞지 않는 용어다. 북한이 무기급으로 만들 수 있는 UEP를 갖고 있느냐인데 아무도 아직 그단계까지 갔다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은 단순히 우라늄농축계획이라는 표현을 쓴다.”

-미국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가.

“한·미 간에 따로 합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최근에) HEU라고 하는 것을 보았나.”

-그럼에도 HEU 문제는 향후 비핵화 논의 과정에서 걸림돌이 될 수 있다.

“UEP문제에 대한 미국 판단의 온전성과 북한 입지를 동시에 살릴 수 있는 해결 방안을 모색 중이다. 그대로 놔둔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몇가지 복안을 강구 중이다. 미리 밝히긴 어렵다. 결정적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북핵 문제가 진전되면서 정치권에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문제와 맞물린 남북 정상회담과 남북, 미ㆍ중의 4자 정상회담 얘기가 나오고 있다. 정부는 어떤 스케줄을 갖고 있나.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수립은 수레의 양 바퀴와 같다. 북한이 경제지원만 받고 핵 폐기를 하겠는가. 정치적 안보, 즉 관계 정상화 및 평화체제를 원한다. 북·미 간, 남북 간 관계정상화를 통한 실질적 변화,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절차적 변화를 통해 평화체제는 이뤄진다. 그리고 한반도 평화체제는 평화를 지켜나갈 실체간에 협의되어야 한다. 불필요한 수준으로 국제화되어선 안된다. 비핵화 진전이 없는데 평화체제가 가능한가. 바퀴 하나만 돌아가면 수레는 그 자리에서 뱅뱅 돈다. 어떤 각도에서든 국내 정치적 함의를 담아 이 중차대한 문제를 해석하고 호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2년 전 9ㆍ19 공동성명을 낼 때 우리가 평화체제를 포함시켰는데 그때 국내 정치·선거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미국에서도 선거철을 일컬어 '어리석은 계절(silly season)'이라고 한다.”

-비핵화 속도가 빨라지면 연내에 남북, 4자 정상회담이 가능하다는 얘기인가.

“북한을 포함한 여러 당사자들이 연내 북한의 핵 시설 불능화를 희망한다. 상황이 진전되면 정상들이 한 번 결판을 지어야 할 시점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9월, 10월 등 시점을 놓고 예단하는 것은 맞지 않다. 특정한 계기나 일정을 염두에 두고, 사전에 디자인해서 정상회담을 하려고 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같은 생각인지 궁금하다.

“노 대통령께서도 무리하게 날짜를 맞춰서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부시 미 행정부에서 북·미 관계 진전의 전기가 마련될 가능성은.

“지난해 9월 한·미 정상회담 이후 미국의 전략적 판단은 북한이 원하는 것을 미국이 내놓고, 대신 북한이 핵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방법도 상호 동시 조치가 아니라 순차적으로, 미세한 시간차가 나더라도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입장이다. 지금 시점은 북한에 절호의 기회다. 북한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기회가 오래 살아있기가 힘들다. 미 행정부가 바뀌면 과거 정부의 정책 방향과 속도를 수정하게 마련이다. 제가 체감하는 기회의 지수는 어느 때보다 높다.”

-최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방북한 양제츠 중국 외교부장에게 “한반도에 긴장 완화의 조짐이 있다”고 했다. 이 면담에서 나온 김 위원장의 메시지는.

“‘움직일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이 아니겠나. 에너지가 축적됐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6자회담은 6자 외교장관 회담이 개최되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달리는 자동차 엔진을 끈 뒤 열쇠를 빼고 보초를 세워두는 단계다. 불능화는 부품을 빼야 하는 단계로 들어간다. 일이 진행될수록 경사는 가팔라진다. 기어를 올리는 작업이 필요한데 그게 외교장관 회담이다. 여기서 확고한 정치적 의지, 무게가 실린 약속이 이뤄지면 불능화와 테러지원국 해제, 적성국 교역법 배제와 같은 관계정상화에 필요한 조치는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

-북핵 문제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우리 정부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미 양국은 지난해 9월 정상회담에서 미래 양국의 국가 이익이 만나는 전략적 공통점을 찾아냈다. 동북아 등에서의 미국의 세계 전략과 우리가 한반도에서 생각하는 이익의 공통점이다. 당시 반기문 외교부 장관, 청와대 안보실장이던 저, 그리고 라이스 국무장관과 스티븐 해들리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만나 양국 정상들에게 보고해 만든 공동의 포괄적 방안은 양국이 현재 가고 있고, 앞으로 나아갈 나침반이다.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묶인 북한 자금 반환 문제 해결 과정에선 긴박한 시간이 많았다. 그 가운데 한국이 있었다. 한국의 위치를 과대 평가할 때도, 과소 평가할 때도 있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무게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크다고 본다.”

-북핵 문제 협조 등 한·미 관계가 전반적으로 좋은 것 같다. 현 정부 초기와 현재의 한·미 관계를 평가한다면.

“초기에는 양국 사이에 총론에 대한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각론 조정을 하다 보니 이라크 파병 문제, 주한 미군 재배치 , 북핵 등 현안을 두고 소리가 있는 것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전환점은 지난해 9월 한·미 정상회담이다. 두 정상은 한반도의 미래와 동북아 협력의 질서가 어떠해야 하는 것에 대해 서로 시각을 맞췄다. 그 바탕에서 현안들을 풀어나갔다. 총론에서 조화하고 각론에서 조정을 거쳐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관계로 들어섰다고 평가한다.”

-6월 초 제주도에서 한·중·일 3국 외교장관 회담이 처음으로 열린 계기는.

“지난 1월 필리핀 세부에서 열린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3(한·중·일)’ 정상회담 때 3국 외교장관들이 따로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아세안 회담의 한 귀퉁이에서 만나서 되겠느냐'며 두 장관에게 제안했다. 3국 간 협력증진은 물론이고 동북아의 평화안정에도 상당한 기여를 할 것으로 생각한다. 향후 이런 관행을 착실히 쌓아나가기로 합의했다.”

-외교통상부가 대대적인 조직개편·인력확충에 나서고 있다.

“우리 외교의 역할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인력과 공관 등 외교 인프라는 비슷한 국력을 가진 네덜란드나 캐나다 등에 비해 2분의 1, 3분의 1 수준이다. 외교 경쟁력은 국가 경쟁력이다. 최근 우리가 재외공관을 10개 신설하고 인력(197명)을 증원한 것은 한계상황에 따른 응급조치다. 앞으로 외교부가 자원에너지 외교, 영사 서비스 강화,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도록 힘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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