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칼럼] 비정규직 갈등의 해법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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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13면

2002년 경남 창원의 어느 대기업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정규직은 통근버스를 타고 회사 현관문 앞에서 내렸지만 비정규직은 시내버스를 타고 걸어 들어오더군요. 구내식당의 식사하는 장소가 달랐습니다. 정규직은 사내 헬스시설을 마음대로 이용했지만 비정규직은 얼씬도 못했습니다. 한 비정규직원은 “기업의 카스트제도”라고 한숨지었습니다. 천민으로 태어나면 평생 천민으로 살아야 하는 인도의 계급 제도에 빗댄 것입니다.

정규직 노조부터 '차별의 빗장' 풀어야

이런 일을 바로잡기 위해 2006년 12월 노사정 합의로 비정규직 보호법이란 건강식품이 생겼습니다.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노동위원회법 등 세 가지 법을 말합니다. 허약한 비정규직의 기운을 돋워주자는 취지에서입니다.

서울 상암동 홈에버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매장을 점거한 채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뉴시스]

그런데 이달 시판에 들어가자마자 곳곳에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회사 입장에선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의 차별을 없애는 데 막대한 돈이 들어갑니다. 자금이 넉넉한 기업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지만 그렇지 않은 기업은 외주를 주는 형식으로 비정규직을 털어내고(해고) 있습니다.

홍준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한나라당)은 12일 한국노총과 환노위원 간의 정책간담회에서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은 법이 잘못됐거나 정부 정책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선진국에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을 차별하는 곳을 찾기 힘듭니다. 독일에선 외주를 주더라도 3년간 단체협약을 그대로 적용해 급격하게 비정규직의 처우가 떨어지는 것을 막습니다. 물론 자발적인 비정규직이 대부분인 외국과 우리나라를 단순 비교하기는 힘든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정규직의 기운을 돋우기는커녕 부작용을 야기한다면 보완책이 필요합니다. 제도를 보완하기 전에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비정규직 보호법의 핵심은 차별시정입니다. 경영계가 외주나 정규직 전환을 서두르고 있는 것은 차별의 소지를 아예 없애겠다는 것입니다. 법 시행에 따른 대응책을 발 빠르게 구사하고 있는 셈입니다. 홍 위원장이 이날 간담회에서 “기업이 용역으로 전환하는 것은 합법적인 것으로 현행 법으로 막을 방법이 없지 않은가”라고 한국노총에 따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노동계의 대책은 뭔지 궁금해집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지난달 금속노조가 총파업을 벌일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금속노조가 사회문제가 된 비정규직 차별 시정을 전면에 내세우지 못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를 내세워 파업에 들어간 것은 노조 내부의 사정 때문입니다. 비정규직 문제를 내세우면 총파업이 안 됩니다.”

정규직 중심인 노조가 비정규직의 처우개선을 내세웠다간 파업동력을 모으기 힘들다는 뜻이지요.

얼마 전 강순희 청와대 노동비서관은 “비정규직의 차별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노조와 정규직의 양보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지금처럼 노조의 이기주의가 수그러들지 않으면 비정규직 보호법의 취지를 제대로 살릴 수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기업이 지불할 수 있는 임금과 복지 수준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비정규직을 정규직처럼 대할 경우 지불능력을 초과해 결국은 경영압박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병원 노사가 7일 합의한 단체협약은 그래서 돋보입니다. 병원 노사는 4월부터 교섭을 했습니다. 병원 측은 지난달 “임금은 5%만 인상하자”고 최종 제안을 했습니다. 병원 관계자는 “노조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노조의 요구(9.3% 인상)에 훨씬 못 미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조가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3분의 1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처우개선을 위해 쓰자”고 역제안을 했습니다. 인상된 임금을 가지고 비정규직을 위해 쓰자는 데 병원이 마다할 리가 없습니다. 이번 합의로 정규직의 임금에서 300억원이 갹출돼 5500여 명의 비정규직 간호사와 의료기사 등에게 혜택을 줍니다.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정책기획실장은 “정규직의 이익만 가지고는 비정규직 문제를 풀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연구본부장은 “병원노사의 합의는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평가했습니다.

지난달 노동부는 비정규직 차별 안내서를 내놨습니다. 학자금이나 가족수당, 성과급 등은 비정규직에게 주지 않아도 차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정규직이 이 돈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비정규직이 노조에 가입하면 됩니다. 노조원이 되면 노사가 체결한 단체협약을 같이 적용받기 때문입니다.

노민기 노동부 정책홍보본부장은 “비정규직의 차별을 없애는 가장 빠르면서도 확실한 방법은 정규직 중심인 노조가 비정규직에게 문호를 여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노조가 이를 모를까요. 한 노동계 인사는 “그런 방법이 있는 줄은 알지만 대놓고 말을 못 한다”고 말했습니다. 스스로 빗장을 걸어놓고 비정규직 차별을 개선하라는 구호만 외치고 있는 셈입니다.

때마침 13일 이상수 노동부 장관, 이수영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이용득 한국노총 위
원장이 ‘비정규직 보호법의 안착을 위한 노사정 합의문’을 내놨습니다. 눈에 띄는 건 노조가 ‘직무에 걸맞게 임금체계가 개선될 수 있도록 협력한다’고 한 대목입니다. 노동계는 그동안 “비정규직을 직군별로 정규직화하는 것은 사실상 차별대우를 고착화시킨다”고 주장해왔습니다. 따라서 직무급 임금체계 개편에 동의한 것은 노동계가 직군별 차별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됩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되 별도의 임금체계를 둔다면 기업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거지요. 한꺼번에 가기보다 차근차근 풀자는 뜻입니다.

노조가 먼저 변하지 않으면 비정규직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것, 최근의 비정규직 사태가 주는 해답입니다.

이랜드 사태란
 
대형 유통업체인 이랜드 측이 500여 명을 해고하면서 촉발됐습니다. 이는 7월 1일자로 시행된 비정규직보호법과 관련돼 있습니다. 법안에 ‘2년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고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을 시정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사측은 오래 근무해 정규직화해야 할 비정규직 사원 중 일부와 재계약을 하지 않거나 외부 용역화했습니다. 정규직을 늘리고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사측은 이것이 경영상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노조는 사측이 비정규직보호법을 악용해 무단해고를 한 것이라고 반발했습니다. 지난달 30일 매장을 점거하고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노조는 해직자 복직과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몇 차례 노사 교섭이 있었지만 번번이 결렬됐습니다. 14일 현재 노사관계는 더욱 험악해지는 분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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