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변호사가 말하는 ‘하버드 로스쿨 라이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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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04면

하버드 로스쿨의 심장으로 불리는 ‘오스틴 홀’. 1880년대에 세워진 고색창연한 건물이지만, 내부에는 첨단시설을 갖춘 대형 강의실들이 있다. [위키피디아]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이 2009년 3월 문을 열게 된다. 하지만 세부적인 교육·운영 방식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이를 두고 각계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로스쿨의 종주국인 미국에선 어떻게 운영되고 있을까. 로스쿨의 '상징'하버드 로스쿨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2002년 졸업자인 매튜 크리스텐슨 변호사의 경험담을 통해 알아본다.

공부벌레서 라스베이거스 도박사까지 입학

매튜 J. 크리스텐슨 변호사

▶긴장의 연속이라는데…=하버드에 입학해 강의동 건물인 ‘파운드 홀’ 앞에 서게 되면 누구나 긴장감과 두려움에 휩싸인다. 한 친구가 “입학승인(admission) 위원회에서 나 같은 멍청이를 통과시켜준 것이 ‘실수’였던 것으로 밝혀질까봐 첫 학기 내내 전전긍긍했다”고 말했을 정도다. 엄청나게 똑똑한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을 바로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말과 행동이 방어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나름대로 장점과 단점을 지닌 사람들이란 사실이 눈에 들어오면서 공포심은 옅어지기 시작했다.

왼쪽부터 존 로버츠 대법원장, 러더퍼드 B. 헤이스 대통령(19대), 앨버토 곤잘러스 현 법무장관. 모두 하버드 로스쿨이 배출한 인물들이다.

▶‘공부벌레’만 들어오나=아니다. 입학 동기가 500명이 넘는 탓에 다 알지는 못하지만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학·경제학·철학·영문학·외국어…. 나 자신도 이미 하버드대 예술과학대학의 동아시아 프로그램 석사과정을 마친 상태였다. 아주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도 적지 않았다. 한 친구는 매사추세츠공대(MIT) 졸업 후 라스베이거스에서 전문도박사로 일하다 왔다. 특출한 암기력이 알려지는 바람에 카지노 입장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도 있었고, 유명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도 있었다. 로스쿨의 특성상 입학자의 다양성을 중시하는 것 같다.

▶소크라테스식 교수법이 실제로 쓰이나=TV 드라마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The Paper Chase)’에 나왔던 킹스필드 교수는 학생들과 판례를 주제로 문답을 주고받는다. 킹스필드 교수는 1870년대의 랑델 학장이 모델로 ‘랑델 홀’이란 건물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상 사례를 중심으로 해결법을 도출해내는 쪽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소크라테스식 교수법이 판사 훈련용으로는 좋을지 몰라도 졸업 후 재판이 아닌 자문 업무를 담당하게 될 다수의 학생들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전에 패널(토론자)이나 답변 차례를 정하고, 자신의 차례가 되어도 모르면 ‘패스(통과)’를 할 수도 있다.

요즘은 많은 교수가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이용해 강의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노트북 컴퓨터로 강의 내용을 정리한다. 강의에 몰입한 가운데 조용히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밖에서 비가 내리는 것처럼 들린다. 강의실 맨 뒷줄에 앉아 있으면 교수들의 강의 실력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강의 내용이 지겨우면 많은 노트북 화면이 ‘MS 워드’에서 테트리스나 지뢰찾기로 바뀐다.

▶몇 학년이 특히 힘드나=로스쿨 3년 중 1학년이 가장 힘들다. ‘원 엘(One-L)’이란 베스트셀러가 있을 정도로 공부 양이 엄청난 시기다. 이 기간에 핵심 과목인 계약법·불법행위법·재산법·민사소송법·형법·형사소송법을 배운다. 매주 열리는 ‘법률문장 작성(legal writing)과 리서치’ 세미나에도 참석해야 한다. 주로 2~3학년 선배들이 법원 제출서류 작성법과 판결문 분석 방법을 가르쳐준다.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거의 잠을 자지 못한다.

1학년 2학기부터는 헌법·국제법·행정법과 같은 선택 과목을 듣는다. 2학년에 들어가면 여유가 생긴다. ‘법과 문학’이나 ‘법과 경제발전’처럼 좀 더 다양하고 세분화된 분야를 공부한다. 내 경우는 자문 업무에 관심을 갖고 파산법·지적재산권법·국제금융·증권규제법을 수강했다. 지난해부터는 로스쿨 커리큘럼에 큰 개혁(reform)이 일어났다고 한다. 국제화에 대비해 국제법이나 국제경제법뿐 아니라 관련 입법과 규제 정책에 관한 강의를 필수적으로 수강해야 한다. 교육 프로그램을 시대변화에 맞춰 나가려는 노력이다.

▶강의실-도서관만 오가나=사실과 다르다. 1학년 1학기 말에는 팀을 짜 현직 판사들 앞에서 실제 변론을 해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운동선수에 대한 도핑 테스트가 주제였다. 나에 대한 판사들의 평가는 이랬다. “유창하게 말을 잘한다. 하지만 법원 판례를 너무 확대 해석해 적용하면 전체적인 신빙성이 흔들릴 수 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조언이다.

또 1학년을 마치면 ‘하버드 로 리뷰’(The Harvard Law Review)’를 비롯해 ‘국제법 저널(ILJ)’ ‘하버드 법과 정책 리뷰’ ‘인권 저널’ ‘환경법 저널’ 등의 편집 멤버로 지원할 수 있다. 나는 국제법 저널에 참여했는데, 이 활동을 통해 같은 관심을 가진 학생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인턴십은 로펌에서만 하나=로펌에서의 여름 인턴십은 로스쿨 학생이 받게 되는 중요한 교육과정이다. 어떤 로펌으로 가느냐를 놓고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버드 출신은 대부분 좋은 로펌에서 인턴을 한다. 1학년 때는 한국과 미국의 로펌에서, 2학년 때는 유명 로펌인 ‘프레시필즈’의 뉴욕과 홍콩 사무소에서 일했다. 결국 졸업 후 프레시필즈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3학년 때는 지역 법률 봉사 차원에서 보스턴의 한 동네에서 영세 사업자와 비영리 단체에 법률자문을 해줬다. 한 의뢰인은 망해가는 인터넷 기업의 대표였는데, 사업체 정리 과정을 도와줬다. 규모는 작았지만 실패 과정에서 겪는 휴먼드라마를 전부 경험할 수 있었다. 법률 문제의 인간적 면을 고민하게 됐고, 객관적인 조언을 해준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로펌 입사 과정은=로펌 채용은 공개적으로 이뤄진다. 1차 주도권은 학생들에게 있다. 2학년에 올라가면 본격적인 리크루팅(채용) 전쟁이 시작된다. 학생들은 로스쿨 측의 주관 아래 인기 로펌과의 인터뷰 기회를 입찰 방식(제비뽑기)으로 얻는다. 인터뷰는 9월 말부터 약 3주간 진행되는데, 찰스 호텔, 셰러턴 커맨더 호텔과 같은 캠퍼스 부근의 고급 호텔에서 이뤄진다. 대형 로펌들은 스위트 룸을 임시 캠프로 쓴다.

한 학생이 보통 20~30번의 인터뷰를 하는데, 로펌 측은 학생의 이력서와 성적을 본
뒤 성장배경과 경험, 관심 분야, 사생활, 취미를 묻는다. 인터뷰 후 로펌들은 대상자를 선별해 회사 경비로 본사 사무실로 초대하는 ‘콜백(call back)’을 한다. 보통 뉴욕 맨해튼이나 LA,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DC, 심지어 해외까지 비행기로 날아간다. 이 인터뷰 후 정식 입사 제의를 받게 된다.

정리=권석천 기자

◆매튜 J. 크리스텐슨(40) 변호사

-유타 주립대

-하버드대 동아시아 언어·문화전공

박사과정 수료

-하버드 로스쿨 J.D.

-뉴욕주 변호사

-뉴욕 로펌 ‘프레시필즈’ 거쳐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국제중재 분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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