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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독자가 달려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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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 달 전 한국과 프랑스 출판인들이 작은 모임을 열었다. 양국의 출판 상황을 살펴보고 교류 방안을 모색하자는 취지였다. 발표자의 한 명으로 참석한 나는 상업성을 중시하는 미국 출판계보다는 출판 철학이 살아 있고, 도서정가제도 잘 유지하고 있는 프랑스 출판인들에게 배울 것이 많으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정작 프랑스 출판인들은 인문도서의 경우 겨우 700부 정도 팔린다고 푸념을 했다. 이 말에 우리 출판인 중 한 사람은 농담 삼아 “한국은 좋은 인문서가 적어도 1500부 정도 팔리니 차라리 우리 사정이 낫군요”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해서 양국 출판인들이 인문도서가 지금보다 훨씬 잘 팔렸던 20년 전의 과거를 그저 그리워하고 추억만 한 것은 아니었다. 책이 절대적 가치를 갖고 주요한 지식, 정보 매체였던 그때보다 온갖 매체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저자와 독자가 쌍방향으로 교류까지 가능하게 된 지금이 보다 민주화된,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라는 데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형식적으로는 정보 수용의 주체가 된 듯하지만, 그리고 자신의 취향과 욕구에 따라 정보를 습득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은 정보 감옥에 갇혀 몰개성에 매몰된 독서인들일 것이다. 그 자리에서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지만, 각별히 내게는 우리 출판 상황을 직시하게 된 것이 큰 소득이었다. 우리 출판 상황이란 얼추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출판의 세계화 현상과 인문도서의 소수 장르화 현상, 미디어 간의 결합 현상과 논술도서 시장의 확대 현상이 그것이다.

 출판시장의 세계화는 지난 수십 년간 지속적으로 진행돼 왔지만 이즈음 거의 폭발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가속화됐다. 영어권에서 잘 팔린 책이라면 거의 동시에 우리 출판시장에서 베스트셀러가 된다. 특히 경제·경영서의 인기는 세계시장의 추세와 거의 같이 간다. 미국 최대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도서를 값비싼 저작권료를 지불하면서까지 도입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인문도서의 소수 장르화 현상도 거의 세계적이다. 독자들은 이제 인문서를 읽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 듯하다. 요즘 많이 읽힌다는 실용서 부문의 책을 좀 더 살펴보고 깊이를 탐구해 보면, 그 원천에 ‘인문과학’이 도사리고 있음을 금세 알 수 있는데도 말이다.

 또한 여러 미디어의 결합 현상도 우리 출판계의 큰 이슈다. 영상과 출판, 문학과 방송, 활자와 음악 간의 결합도 들 수 있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매체 간의 결합이 출판 그 자체, 글쓰기 자체의 근원적인 변화까지도 추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하나의 콘텐트로 여러 미디어를 통해 배포하는 방식에서부터 근원적으로 저자가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애초의 그 방식 자체에까지 큰 변화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논술시장의 확대도 주목할 만하다. 인문학적 글쓰기라고 할 논술에 필요한 콘텐트를 어디서 수급할 수 있을까가 청소년은 물론 학부모에게도 큰 관심사가 되고 있다. 고전의 재출간, 독서교육이나 글쓰기에 관한 책들도 논술시장의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지금 우리 출판계는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바로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일’이다. 이 시대 독자들은 장소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디지털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 환경에 놓여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 1위인 한국의 독자들은 어떤 독서 문화를 창출할 것인가. 그리고 출판계는 새로운 독자들에게 어떤 콘텐트를 제공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사유해야 한다. 언젠가는 ‘나만의 공간에서 조용히 독서를 하는 독자’의 모습을 그저 낭만적인 아이콘으로밖에 떠올릴 수 없는 미래가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시인

 ◆약력:이화여대 정외과 졸업, 대한출판문화협회 상무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