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파“최틀러”/“판단은차게 행동은 뜨겁게”최병렬(의원탐구:2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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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공보·노동부장관 지내며 난제마다 정면돌파/김 대통령 신임도 큰 “노 사람”
김영삼대통령의 중요 인선이 다 끝났다. 지금은 어느 자리에도 없지만 그동안 핵심요직 물망에 끊임없이 올랐던 인물중 한사람이 최병렬의원(민자·전국구 2선)이다.
그는 잘 알려진대로 「노태우 사람」이다. 87년 그의 당선을 도왔고 노 대통령 정부에서 요직을 지냈다. 「헌 사람」인데도 왜 중용설이 따라다녔을까. 이를 살피자면 대선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후보당선 직후인 지난해 5월말 김영삼후보는 최 노동부장관(의원 겸직)에게 『대선 홍보총책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최 장관은 『필요하면 현 정권도 꼬집어야 하는데 내가 그 일을 어떻게 하느냐』고 사양했다.
김 후보는 최 의원을 놔주지 않았다. 최 의원은 11월께 결국 전략사령탑인 기획위원장을 맡아야 했다. 김 후보의 포석은 효력을 발휘했던 것 같다.
기획위원 전체가 뛰었지만 최 의원의 추진력이 엔진역할을 했다는게 중평이다. 그는 매일 새벽 2,3시까지 여론조사팀을 「닦달」했고 전병민실무간사(정책수석 사퇴자)를 혹사시켰다. 결전이 임박해오자 그는 홍보상황실장까지 맡았다.
최 의원의 엔진출력은 그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김 후보가 유세에서 원고를 읽지않자 『후보는 배우입니다. 연출팀이 하자는대로 해야합니다』고 밀어붙였다. 그의 불같은 추진력을 익히 알고있는 인사들이 「최병렬중용설」을 얘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 의원 자신은 기획위원회 첫 회의에 『새로 만들어지는 정부에서 자리를 맡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고 1월 중순 김 대통령에 『새사람을 써야한다』고 진언했다.
최 의원의 별명은 「최틀러」(히틀러에서 따온 말)다. 70년대말 그가 조선일보 정치부장을 하면서 혹독한 지휘력을 발휘하자 후배기자 김명규(현 편집국장 대우)가 붙여주었다고 한다.
최 의원은 『판단은 차고 신중하게,행동은 뜨겁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청와대 정무수석·공보처·노동부장관 등 자리마다 난제에 부닥쳤고 그때마다 「정면돌파」했다. 상대편은 항상 그를 강성·매파라고 몰아붙였다.
정무수석시절 그는 5공청산은 불가피하며 전두환 전대통령이 연희동을 떠나야 한다고 굳게 믿었고 그렇게 일을 추진했다. 전 전대통령은 그를 「손볼 사람」속에 넣었다. 최 의원은 지금도 『그때 일은 시대적 요청』이라는 생각을 굽히지 않고있다.
공보처장관이던 90년 그는 KBS 노조사태때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서기원사장이 경찰투입을 꺼리자 자신이 결재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임명한 사장이 노조에 의해 쫓겨날 수는 없다』는게 그의 신념이었다. 노조원들은 최 장관을 『노조탄압의 주역』이라며 화형식으로 적대감을 나타냈다.
최 노동장관은 『우리나라의 임금체계가 잘못됐다』며 총액임금제를 밀고나갔다. 노조는 『우리에 대한 선전포고』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최 의원(56)은 지리산 천왕봉 밑 깡촌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6·25동란중 작고해 그는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내야했다. 그는 진주중·부산고를 거쳐 서울대법대에 진학했다. 부산고 동기동창에는 허삼수·허문도·정구영·김진영 같은 이름들이 있다. 특히 허삼수·김진영씨와의 인간관계가 그의 진로에 영향을 미친다.
최 의원은 대학졸업후 한국일보를 거쳐 조선일보 정치부기자가 됐다. 정치부에선 남재희부장(전민자당의원)·김용태(민자당총무)·김동익(전정무1장관)·박범진(민자당 부대변인)·김학준(전청와대 대변인)·주돈식(청와대 정무수석)기자 등과 같이 일했다. 71년 신민당 대통령후보 선출때 최씨는 자신이 좋아하던 김영삼후보가 김대중후보에게 패하자 조윤형의원과 함께 셋이 인사동 밥집에서 만취돼 껴안고 운적도 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최씨는 『박 대통령은 위대한 지도자』라는 신념을 굳혔다. 국력집합·동원에 대한 그의 철학은 이 무렵 기틀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80년 신군부가 등장했을때 최씨는 『야당집권은 아직 이르다』고 믿었다.
87년 대선때도 이 판단이 바뀌지 않았다고 그는 말한다. 84년말 허문도정무수석·이상재민정당사무차장을 통해 전 대통령으로부터 전국구를 제의받고 여러차례 거절했다고 한다. 그때도 5공에는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고 단지 언론을 떠나 정치로 변신하는 것이 싫었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 버티면 신문사에 남기도 힘들다』는 얘기를 들었고 결국 공천발표날 새벽 1시에 수락도장을 찍었다는 설명이다.
85년 민정당 정세분석실장을 맡은 최 의원은 치밀한 정세판단으로 노태우 당대표의 신임을 쌓아나갔다. 6공에 들어서는 박철언의원과 대립관계에 있었다.
최 의원은 여당체제를 방어하는 소신파다. 그래서 반대세력으로부터는 『소신·논리가 한쪽으로 치우쳐있다』는 화살을 받기도 한다. 그는 이를 단호히 반박한다. 『내 소신은 여야개념이 아니다. 국익을 앞서는 것은 없다. 지금은 나라의 위기다. 김영삼대통령은 눈치보지 말고 국익에 옳은 일은 밀어붙여야 한다.』<김진기자>
◎최병렬의원 약력
▲경남 산청산·56세 ▲부산고 서울대법대 ▲조선일보 정치부장·편집국장 ▲민정당 전국구의원 ▲청와대 정무수석(6공) ▲공보처장관 ▲노동부장관 ▲전국구 2선(민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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