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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가 김문응씨|『방랑시안 김삿갓』『눈물의 연평도』등 작사|"망향 설움" 노랫말 4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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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흰 구름 뜬 고개 넘어가는 객이 누구냐…」. 요즘에도 정겨운 잔이 오가는 자리라면 누군가 반드시 취기 어린 목소리로 한 곡조 뽑곤 하는 노래 『방랑시인 김삿갓』.
발표된 지 이미 40년째 접어드는 이 노래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 사이에선 사랑 받는 옛 노래 중 하나지만 지금 서울 변두리 월 15만원짜리 사글세방에 살고있는 「김삿갓」에 대해 알고 있는 이는 거의 없다. 김문응씨(77·서울 보문동 1가 22).
『방랑시인 김삿갓』의 작사가로서 김삿갓 못지 않게 떠돌이 삶을 살아온 그는 『눈물의 연평도』 『수덕사의 여승』 『단벌신사』 등 숱한 히트 작을 낳은 빛나던 재능이 무색하게 이젠 동사무소에서 한달 6만원의 생활비와 쌀을 지급 받는 생활보호 대상자로 살고있다.
『난 이제 「저쪽」으로부터 올 소환장을 기다리고 있는 몸…』이라며 비장한 어투로 말문을 연 그는 이제 할 일은 끝내 잘못된 채 남지 않을까 두려운 우리 가요사의 진실을 바로잡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비의 탱고』 『기분파 인생』 등은 분명히 자신이 작사한 곡임에도 불구하고 알려진 가요 40여곡 중에 절반이 타인의 이름으로 발표돼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얼마전 모 레코드회사의 사장이라는 이가 찾아와 개인적으로 주머니에 넣어주고 간 위로금이 그의 사글세방 보증금으로 남아있다. 83년 그는 이에 대해 법적으로 대응하는 등 일을 벌여 보기도 했으나 모두 나 몰라라 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해결을 보지 못한 채 세월만 흘렀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쨌거나 내 삶이 그래도 헛되지만은 않았구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노래들 뿐』이라며 낡은 음반을 어루만지던 그는 『나는 본래 오페라 작가로 일찍이 「마의 태자」 「콩쥐팥쥐」 「견우직녀」 「춘향전」 등의 오페라 대본을 썼으나 무대에 제대로 올려보지 못한 게 평생의 한』 이라며 한숨지었다. 1916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당시 삭주 군수를 지낸 부친 김두식씨의 3남중 막내로 태어난 김씨는 연희전문 문과 출신의 엘리트 시인 윤동주와 항일운동을 했던 송몽규 등은 모두 그의 입학 동기생이다.
연희전문에 입학하기에 앞서 일본 구마모토현 제5고등학교에 재학했던 그는 일본에서 오페라 『나비부인』을 본 후 그 전율감을 잊을 수 없어 오페라 대본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오페라 대본습작을 해왔다.
전문학교 재학시절 기숙사가 작사공모에도 당선돼 작곡가 현제명씨가 곡을 붙이는 행운을 잡는 등 노랫말 짓는 데엔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는 졸업 후 고향선전에서 이화여전 출신 장의규씨와 결혼하고 선천상업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했다.
김씨가 평양국립가극단 가극 대본 공모에서 『마의 태자』가 당선됨으로써 국립가극단의 전속작가로 등용된 것은 1948년. 그때부터 적어도 6·25 내전까지 그는 1남2녀를 둔 행복한 가장이었으며 또 장래가 촉망되는 가극작가였다. 그러나 6·25는 그로부터 가족과 오페라 두 가지 모두를 빼앗아갔다. 한때 선천을 점령한 유엔군에 의해 시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던 그는 곧 중국 군이 밀려오자 홀로 월남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후 42년의 세월.
월남 후 김씨는 『방랑시인 김삿갓』 이란 노래로 한 많은 가요 무대를 두드린 후 꿈꾸던 오페라 대신 4백여곡 가요의 노랫말을 지어 레코드회사에 넘겨주고 받은 몇 푼의 돈을 주머니에 넣고 사글세방을 전전하는 방랑생활을 계속해왔다.
오페라를 무대에 올려 보려고도 했으나 세상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으며 남한에서 다시 꾸렸던 가정도 왠지 오래 가지 못했다. 이런 아픔을 겪는 와중에 만들어진 주옥같은 노래들.
4백여 곡이나 되는 (미발표 포함) 많은 곡들 중에서도 그는 가수 송춘희씨가 불러 크게 히트했던 『수덕사의 여승』을 첫손에 꼽는다.
김씨가 당시 세간에 떠들썩했던 춘원 이광수와 김일섭 스님의 사랑을 모델로 지었다는 『수덕사의 여승』은 송춘희씨가 무대에 설 때마다 승복을 입고 목탁을 치며 노래해 주목을 끌었던 곡이다.
전후시대의 터널을 지나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김씨가 쓴 작품 중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 있는 노래가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곡이 가수 김상진씨가 불러 크게 히트했던 『고향이 좋아』 남인수가 불렀던 『향수』. 「타향은 싫어 고향이 좋아」 라는 노랫말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직선적으로 뱉어낸 『고향이 좋아』는 김씨가 시인 양명문(작고)과의 술좌석에서 나눈 얘기가 계기가 됐다고 한다.
평양출신으로 같은 실향민의 처지였던 양씨가 『타향도 정들면 고향과 같지 않느냐』며 위로했던 말에 그는 『고향이 더 좋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강하게 응수했었다고. 「물어보자 뜬구름아 너 가는 곳 어드메냐/내 고향 가거들랑 나를 태워주려무나」라는 『향수』 의 노랫말 역시 그의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다.
이젠 눈앞에 어른거리는 기억을 더듬으며 친분관계가 있던 윤동주·이광수·윤이상·강신명 등 인물을 중심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김씨. 『고향도 가족도 잃었고 평생의 꿈이던 오페라도 잃었습니다. 그 아픔을 달래며 지은 노랫말조차 잃은 채 어떻게 눈을 감을 수 있겠습니까. 제 이름을 돌려주십시오 이 손때에 전 그의 수첩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 그가 지난해에 지었다는 『고향 가는 이산가족』 이란 제목의 노랫말이 힘없는 글씨체로 앉아있었다. <이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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