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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산 홍수에 찌드는 농촌-본지 현장 취재|값 폭락…영농 포기…이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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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값이 폭락하지 않는 농·수·축산물이 없다.
게다가 판로마저 막혀 어려움이 더욱 가중되고 있다.
이 때문에 살길이 막막해 졌거나 타산을 맞출 수 없게 된 농·어민들은 지금까지 생활수단으로 삼아 매달려 온 작목 중 수입량 증가로 피해가 크거나 전망이 어려운 복숭아·대추나무 등을 베어내고 당장은 수입되지 않는 배추·무 같은 작물을 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곳에서는 아예 생산·채취를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특히 이 같은 사태는 이농현상을 더욱 부채질해 도시집중화 현상과 농·어촌 고령화·여성화에 이은 공동화 현상을 가속화시키는 사회적 문제로 연결될 수밖에 없어 심각성을 더해 주고 있다.
농·어촌이 특히 중국산 농·수·축산물에 밀려 이같이 파탄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은 다양한 종류의 물량이 워낙 많이 쏟아져 들어오는 데다 가격면에서 경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싸기도 하지만 국내적 요인으로는 유통구조와 제도의 개선 등 국내산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까지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가격 농간으로 막대한 중간이익을 챙겨온 중간상인들이 이번에는 수입물량을 앞세워 또다시 생산자들을 상대로 농간을 부리며 값을 대폭 깎아 싸게 매입하는 수법으로 더 많은 시세차익을 노려 횡포를 일삼는 데도 상당한 원인이 있는 것으로 진단되고 있다.
그 문제점과 농·어촌의 실태를 중앙일보 전국 취재 망을 통해 총 점검해 본다.

<도매시장서 부채질>
문제점=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중국 농·수·축산물의 대량유입에 따른 심각성을 강조, 최근 정부에 낸 보고서 「한·중 농림수산분야 협력방안」을 통해 『수입 농산물로 인한 농촌경제는 국제화·개방화에 대비한 유통과정의 원산지 표시 의무화 등 정책 당국의 준비가 없었던데 큰 원인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연구원은 이어 유통제도상의 문제점으로 『국내 농·수·축산물 유통과 보호를 위해 국민들의 세금으로 만든 도매시장이 수입상들의 유통수단으로 전락해 수입품의 소비를 끊임없이 조장·확산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국내 생산품을 저장하기 위해 정부보조로 건립된 창고시설도 이들 수입품이 점유하도록 방치해 국내산의 수급조절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고 진단하고, 중국산 수입 홍수에 대해서는 『중국측에서 우리 시장을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쪽 대기업이나 상인들이 시세 차익만을 노려 무차별 수입해 오는데 바로 문제가 있다』고 분석했다.
경남도 안두환 농어촌개발국장도 『수입 농산물의 원산지표시를 정확하게 해야만 질 좋은 우리 농산물이 타격을 덜 입게되고 소비자들도 값싼 농산물을 비싸게 사는 일이 없을 것』이라며 『그러나 현재는 판매업자가 원산지 표시를 하지 않아도 처벌 규정이 없어 농·어민이나 소비자들이 피해를 보는 일이 많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대 김성훈 교수(농업경제학)는 『이 같은 상황으로 인해 빚어지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보다 농·어민들이 정부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라며 『농촌의 경우 땅을 지키며 농사지으려 하기보다는 농토에 대한 규제가 풀리기만을 기다려 값이 올라 한몫 잡기만 하면 고향을 떠나려는 말기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경고하고 농·어촌에 대한 전반적이고도 다각적인 대책을 촉구했다.
◇값 폭락 실태=경북 의성 농협은 『지난해 5월 도토리 가공공장을 설치해 연간 1백11t의 도토리 전분을 생산하고있으나 수입 도토리 때문에 값이 지난해 말부터 kg에 2천4백원에서 생산비 이하인 1천2백원으로 떨어져 공장 건립비만 날리게 됐다』며 걱정이 태산같다.
경북 영풍군 문수농협도 91년부터 도라지 건조 공장을 지어 마른 도라지를 생산해오고 있으나 6백g 한 근에 1천5백원에서 1천1백원으로 떨어져 운영 난을 겪고 있다.

<염소까지 파동우려>
수협 제주도 지회는 『남제주군 성산포와 북제주군 한림읍을 중심으로 91년의 경우 30여 척의 어선이 연간 1천1백여t의 까치복을 잡아 92억원의 수입을 올렸으나 지난해부터 중국산이 대량 수입되기 시작한데다 해상 밀수를 통해 들어오는 양도 만만찮아 값이 종전에 8천원에서 절반인 4천원으로 떨어져 지난해에는 4백20t을 잡아 20억원의 수입을 올리는 데 그쳤다』고 말했다.
경남 양산의 명물인 기장미역도 출하시기를 맞았으나 중국산 수입에다 주요 수출 대상 국이던 일본에서마저 미역풍작으로 수출길이 막혀 지난해 kg에 2백원 하던 것이 올해는 1백55원으로 떨어진데다 판로마저 제대로 트이지 않아 어민들의 애로가 크다.
염소의 경우 지난해 한중 수교 후 중국산에 이어 호주·뉴질랜드산까지 대량 수입되면서 지난해 말께부터 값이 폭락하기 시작, 20kg짜리를 기준으로 할 때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강원도에서는 91년 최고 40만원까지 거래됐던 암컷이 요즘은 15만원 선까지 떨어졌다.
또 수컷은 91년 27∼28만원에 거래되던 것이 12만원 선으로 폭락했다. 게다가 국내 사육 마리 수까지 크게 늘어난 데다 대개 가을철에 접어들면서 약용으로서의 수요가 봄이 되면서 급격히 줄어 값 폭락 속에 한차례 파동이 우려되고 있다.
또 경남 합천·함양·거창 등에서는 88년 이후 두충을 대량으로 심기 시작, 심은 지 7년째인 94∼95년부터 본격적인 수확을 앞두고 있으나 중국산수입으로 kg에 2만원 정도 하는 현재 값이 폭락할 것으로 예상돼 주민들은 『그 동안 들인 비용도 건지지 못하게 될 것 같다』며 걱정이 태산이다.
생산포기=경북 경산군 압량면 부적리에서 88년부터 6천평에 대추나무 1천 그루를 재배해오던 강대원씨(56)는 연간 1억원의 소득을 올렸으나 지난해부터는 수입 대추 때문에 값이 15kg들이 상자 당 8만원에서 5만원으로 크게 떨어져 수익을 맞출 수 없어 지난달 대추 나무을 모두 베어 내고 다른 작목으로 바꿀 준비를 하고 있다.
땅콩 주산지 중 한 곳인 경기도 여주군은 땅콩의 재배면적·생산농가·생산량이 88년을 고비로 크게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때 전국 생산량의 10%, 경기도 내 생산량의 40%까지 차지했던 여주 땅콩은 88년 2천15농가가 4백9만5천평에서 2천88t을 생산했으나 차츰 줄어들기 시작해 지난해에는 1천6백18농가가 3백2만1천평에서 1천9백22t을 생산, 4년 사이 재배면적은 26%인 1백7만4천평, 농가 수는 19%인 3백97농가, 생산량은 7%인 1백56t이 각각 줄었다.
군 관계자는 『이 같은 감소추세는 정부의 수매가격이 시중가격보다 싸게 책정돼 있는데도 그 이유가 있겠으나 무엇보다 중국산의 대량수입으로 인한 가격 폭락과 일손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라며 『감소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칡뿌리·오미자 등 한약재 주산지인 경남 합천·거창·함양 등 1백여 농가들은 연간 칡뿌리 1백여t을 생산, kg에 1천2백∼1천3백원에 팔아 한해 1억2천여만원의 소득을 올려왔으나 중국산 때문에 값이 폭락해 지난해부터는 아예 채취를 포기, 거의 출하되지 않고 있다.
금산군내 1천8백 농가는 인삼을 경작한 밭에 더덕·도라지 황기·당귀 등 30여종의 약초를 재배해 연간 8백여t을 생산, 지난해까지만 해도 황기는 6백9에 평균 1만8천원 했으나 17일 열린 장에서는 38%인 7천원선, 건지황은 종전 4천원선의 42%인 1천7백원선으로 가격이 형성되는 등 모든 약초 가격이 크게 떨어졌다.

<일손부족까지 겹쳐>
군 관계자는 『이 때문에 올해는 재배포기 농가가 많아 재배면적이 종전 2백23ha에서 1백70여ha로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대책=정부는 원산지 표시대상을 현재 참깨 등 농산물 66종, 고사리·더덕 등 임산물 9종, 홍합등 수산물 10종을 포함한 85개 품목에서 오는 5월1일부터 1백86개 품목으로 늘려 소비자들이 수입 농·수·축산물과 국내산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수입품을 국내산으로 속아 비싼 값에 사는 일이 없도록 할 방침이다.
또 현재 수입업자에게만 의무화하고 있는 원산지표시 규정을 고쳐 유통과정에서 국내산으로 속여 파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판매업자들에게도 의무화하고, 위반 때의 처벌규정을 신설해 7월1일부터 최고3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릴 수 있도록 했다.
지금은 무역업자에게만 이를 적용, 위반할 경우 무역업정지 또는 과징금을 물릴 수 있도록 돼 있다.
그러나 관계자들은 『이 같은 규제조항을 신설한다 해도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감시 기능이 뒤따르지 못하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벌써부터 그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전국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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