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무소속」/민자당 갈까말까 강창희(의원탐구:2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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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실리와 명분사이 진로 고심/한때 신당행 탐색… 마음들 안비운 것같아 포기
□강 의원 약력
▲대전출신(49세) ▲대전고 ▲육사졸(25기) ▲육군대교수(중령예편) ▲민정당 조직국장 ▲11,12대의원 ▲총리비서실장 ▲14대 무소속당선
지난해 3·24총선에서 모두 21명의 무소속 의원이 탄생했다. 그러나 대선이라는 커다란 정치행사를 거치면서 개원 1년도 채 안돼 이중 20명이 각자 정당을 찾아 새살림을 차린 반면 한 사람만이 무소속을 고수하고 있다.
그가 바로 강창희의원(대전중구)이다. 그라고 영입교섭대상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는 초선직후부터 지금까지도 선배정치인들의 끊임없는 입당권유에 시달리고 있다. 대선이 공고되고 입당교섭이 더욱 집요해지자 그는 아예 몸을 피해 1주일간 가나안농군학교에 입교해 버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강 의원이 내세우고 있는 「무소속 고수」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지역구 유권자들과의 약속이 그것이다. 그는 총선때 세차례의 유세를 통해 『당선되더라도 민자당에 입당치 않겠다』고 선언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사면초가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한 약속이었습니다. 여당쪽에서는 앞으로 당선돼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무소속 후보를 찍지 말라고 호소했고 야당후보들은 나를 찍어주면 민자당에 갈 사람이라고 몰아붙였으니까요.』
당선된후 그는 입당 교섭을 받고 유권자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과 정당의 뒷받침없이 혈혈단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실리사이에서 고민도 했다고 털어놓는다.
『어느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지금은 정치에 대한 신뢰회복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때라고 판단했습니다. 최소한 4년임기의 반정도는 채운뒤 지역주민들의 뜻을 물어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강 의원은 대전중·고와 육사(25기)를 거쳐 군인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던 그가 정치인으로 변신한 것은 80년 11월. 진해 육군대 교수로 있다가 중령으로 예편한뒤 당시 실세였던 허화평씨(현 민자의원)의 주선으로 민정당 창당작업에 참여했고 이듬해 4월 창당과 함께 조직국장을 맡았다.
군인시절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5공이후 그에게는 「전 전대통령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줄곧 붙어다녔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운동에 소질이 있던 강 의원은 육사에 진학하자마자 축구선수로 발탁됐고 생도 1년때 베스트 멤버로 기용될 만큼 기량을 인정받았다. 더욱이 그는 장관급 인사(부친이 당시 충남대총장)의 자제로서 주목의 대상이었다. 이 무렵 중령계급으로 축구선수 출신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던 전 전대통령과의 첫 대면이 이루어졌다. 그후 다시 만난 것이 81년 민정당 창당대회 때였다. 전 전대통령이 그를 알아보고 『군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길 왜 왔느냐』며 호통까지 치더라는 것이다.
그는 83년 7월 민정당 전국구의 이헌기의원이 보사부차관으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전국구예비후보 1번으로 의원직을 승계,처음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3개월후 아웅산사태로 전면 개각이 단행되면서 39세의 나이로 총리 비서실장에 발탁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총리 비서실장 발탁 역시 전 전대통령과 나와의 관계를 연관시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이는 사실과 달라요. 인선과정에서 전 전대통령은 내가 너무 젊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는데 당시 진의종총리가 적극 천거했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이같은 설명에도 불구,결과적으로 전 전대통령의 후광임을 부인할 수 없다. 12대때는 대전에서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2선을 기록했다.
그러나 순탄했던 그의 정치인 생활도 6공에 접어들면서 시련의 연속이었다.
우선 88년 4·26총선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것도 5만표가 넘는 압도적인 표차였다. 이듬해엔 부인 이재숙씨(44·의사)가 유방암 수술을 받는 어려움까지 겪어야 했다. 90년 3당 합당이 이루어지면서 지구당위원장 자리마저 내주고 말았다.
『정말 어렵고도 힘겨운 4년이었습니다. 전가족이 대전으로 이사해 그야말로 발로 뛰어다녔지요. 그러다 보니 「군인출신」 등 과거의 부정적 이미지가 많이 없어졌습니다.』
강 의원은 지난해 10월 신당추진작업때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다. 강영훈총리를 찾아가기도 했고 이종찬·정호용의원과도 수차례 만났다. 그러나 막바지 단계에서 불참의사를 천명하고 무소속을 고수했다. 그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때문에 신당에 참여하려 했으나 그분들이 말로는 마음을 비웠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비운 것 같지 않아 대열에서 이탈했다고 말한다.<신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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