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구의 역사 칼럼] 기생 머리값의 진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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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27면

며칠 전 종영한 TV 드라마 ‘쩐의 전쟁’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다. 역시 돈만큼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도 없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기생과 돈 얘기를 한번 해보자.

조선시대 기생이 처음 수청을 들면 대가는 얼마였을까. 다시 말하면 기생의 성인식, 즉 ‘기생 머리 올려주기’에는 돈이 얼마나 들었을까.

어린 기생이 처음으로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의식을 ‘대발(戴髮)’이라고·한다. 글자 그대로 ‘머리를 올리는 것’이다. 근래까지도 ‘기생 머리 올려주는 값’이니, ‘기생 머리값’이니 하는 말이 회자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비용이 결코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1794년(정조 18년) 9월 3일 밤, 평안도 영변에서는 음주가무가 베풀어졌다. 다음 날 있을 무과(武科) 시험 관계자들을 위한 자리였다. 전편에서 여러 번 언급된 바 있는 노상추(盧尙樞·삭주부사)는 이때 부시험관으로 영변에 차출되어 와 있었다.

먼저 기생 월계(月桂)와 홍옥(洪玉)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월계는 18세, 홍옥은 16세, 한창 꽃다운 나이다. 그들은 검무(劍舞)를 선보였다. 노상추는 검무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 자신이 기록한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참으로 ‘묘(妙)한 춤’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섹시하다’는 뜻이리라. 이날 홍옥의 검무는 노상추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던 모든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더구나 홍옥은 아직 머리도 올리지 않은 어린 기생이었다.

여러 수령 중에 위원영공(渭原令公)이 제안을 했다. “홍옥은 춤도 잘 추고 아이가 아주 사랑스럽소. 이 애가 훌륭한 관직자를 만나 머리를 올려 어른이 된다면 이 아니 좋은 일이겠습니까? 예로부터 명기가 관장(官長)을 만나 성인이 되는 것을 호사(好事)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위원영공의 뜻은 오늘 밤 이 자리에서 홍옥의 머리를 올려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좌우를 둘러보건대, 노영공이 연배가 가장 젊으니 이 일을 맡아주면 어떻겠소?”라고 했다.

노상추는 속마음과는 달리 “예, 아름다운 일이지요. 이 일을 마다한다면 그야말로 졸장부가 아니겠습니까?”라며 쾌히 승낙했다. 위원영공은 그 자리에서 2000동(銅)짜리 수표를 썼다. 이어서 영변수령이 2000동, 희천수령이 1000동, 노상추 자신이 2000동 해서 모두 7000동을 모았다. 잠시 후 홍옥의 어미 차설매를 불러서 머리 올릴 준비를 하게 했다. 술자리가 파한 뒤 차설매가 홍옥을 데리고 노상추 방으로 왔다. 술을 몇잔 마시고, 차설매가 나갔다. 그리고 홍옥이 수청을 들었다.

그렇다면 7000동은 과연 어느 정도나 되는 돈일까. 동이 어떤 화폐 단위인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경제사 교수에게 조언을 구한 결과 7000동은 70냥(兩)으로 추산됐다. 조선 18세기 한양에서 번듯한 기와집을 한 채 사려면 대략 100냥쯤 들었다고 하니 ‘집 한 채 값’인 셈이다. ‘기생 첩 들이느라고 집 몇 채 날렸다’는 말은 실증에 근거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위의 ‘연회 일기’에서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어린 기생의 첫날밤을 책임진 노상추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 마냥 좋기만 했을까?

‘이것이 대장부 풍도(風度)라고 하지만, 반드시 꼭 그렇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혼자 웃었다.’ 노상추의 내심이다. 조선의 양반 남자들은 때로 서로에게 강박이 되었다. 세속에서 풍류로 규정하는 것은 곧 풍류이다. 행세하고자 하는 양반이라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남에게 보여지는 것에 목숨 거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노상추의 속말에서는 이런 강박에 대한 소리 없는 저항이 느껴진다.

기생 머리값의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