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판결] 호주大法 “음식점 혹평 기사는 명예훼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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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13면

타이어 제조회사로 유명한 프랑스의 미슐랭은 1900년부터 지도·여행지 가이드북을 만들어 여행객들에게 배포하고 있다. 가이드북에는 숙박정보뿐만 아니라 좋은 레스토랑이 포함된다. 최근에는 프랑스 전역의 레스토랑을 몰래 조사해 별 1개부터 3개까지 평점을 매기는 ‘미슐랭 가이드’로 유명하다. 엄격한 심사 덕분에 프랑스인들은 맹목적일 정도로 신뢰하고, 지난해보다 평가를 낮게 받았다고 자살하는 요리사가 생길 정도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호주의 시드니 모닝 헤럴드 신문사의 음식비평가인 매튜 에번스는 4년 전 시드니의 고급 레스토랑인 코코 로코 음식점을 혹평하는 기사를 썼다. 그는 “굴 리몬첼로는 자동차가 충돌했을 때처럼 그 향이 거슬리고, 너무 달고 미끄럽고 짜고 쓰다”고 평했다. 그리고 “닭요리는 매우 따분하다. 돼지고기는 그 씹히는 맛이 바짝 마른 시리얼을 연상시킬 정도”라고 덧붙였다.

음식점 주인은 이 기사로 레스토랑의 명성이 손상됐으며, 300만 호주달러(약 23억원)를 들여 단장했는데 문을 열자마자 손님이 끊겨 재산 피해를 보았다며 소송을 냈다. 호주의 1심과 항소심 법원은 명예훼손으로 볼 수 없다며 신문사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대법원은 지난달 17일 재판관 6대1의 의견으로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판결하고 원심 판결을 뒤집었다.

이제 소송은 하급법원으로 돌아가 기사의 공정성을 놓고 심리가 계속될 것이다. 에번스의 평가처럼 음식이 진짜 형편없었는지를 따지게 된다. 이 신문사의 앨런 오클리 편집국장은 “이번 판결로 연극·영화 심지어 자동차의 품질을 평가하는 기사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면서 “불행한 선례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신문기사나 TV 프로그램의 ‘맛집’을 둘러싼 소송이 없다. ‘맛집’의 음식은 모두 훌륭하고 간혹 흠이 있더라도 그것은 ‘양념’에 그친다. 정말 맛있는 집만 골라 소개해서 그런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기사를 써서 그런지 잘 모르겠다.

이번 재판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최근 호주 언론인들은 언론의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호주의 알 권리(Australia’s right to know)’ 캠페인을 시작했다. 취재원 보호와 관련해 현직 기자가 재판을 받는 것이 계기가 됐다. 이들은 “국민의 알 권리를 제한하는 많은 법이 하나하나 놓고 볼 때는 그리 사악해 보이지 않지만, 한데 모여서 매우 우려할 만한 상황을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형법상 명예훼손죄는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때’에는 예외적으로 처벌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표현의 자유), 알 권리와 프라이버시 보호라는 충돌하는 가치의 조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민사상으로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를 한 경우라도 그것이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으로서 그 목적이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인 때에는 진실한 사실이라는 증명이 있으면 그 행위에 위법성이 없는 것으로 본다. 그 증명이 없더라도 행위자가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위법성이 없다는 것이 대법원의 태도다.

특히 언론매체의 보도를 통한 명예훼손에 있어서 보도 내용이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지 여부는 언론사가 보도 내용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적절하고도 충분한 조사를 다했는지, 또 그 진실성이 객관적이고도 합리적인 자료나 근거에 의하여 뒷받침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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