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몰락 뒤안길 조명|자보 감독『엠마와 부베의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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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지난 한해동안 국내에 수입된 외화는 모두 3백18편이다. 이 정도면 한국도 세계정상급의 영화수입 국이라 자부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특정한 몇몇 나라의 영화가 우리 극장가를 점령하고 있는 상황은 여전하다. 세계각국의 다양한 영화들을 접하게 되리라는 우리의 기대는 아직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이스트반 자보 감독의『엠마와 부베의 사랑』(뤼미에르·르네상스극장 상영·사진)은 국내에선 보기 드문 헝가리영화라는 점뿐만 아니라 오늘날 동구권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솔직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자보는 60∼7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의 영향을 받은 실험적인 형식의 영화를 만들다 80년대 들어 보다 리얼리즘 적인 작품을 내놓으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인물이다. 그의 변함없는 관심사는 격변기 사회에서의 개인의 파멸이다. 사회주의자인 연극배우가 파시스트로 변신하는 과정을 그린『메피스토』,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는 구체제 군인의 몰락을 묘사한『레들 대령』등 이 이름 잘 보여준다.
『엠마와 부베의 사랑』은 이러한 관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으면서도 보다 동시대적이고 일상적인 소재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부다페스트의 한 초등학교에서 러시아어 교사로 근무하는 엠마는 페레스트로이카와 함께 러시아어가 쓸모 없어지자 야간에 영어교육을 받고 전날 배운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늘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는 그녀는 아르바이트로 주당 2회씩 부자 집의 청소부노릇을 하면서 연명해 나간다. 구체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 물결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엠마와 그녀의 룸메이트인 부베는 그 동안 쌓아 놓은 지위나마 지키기 위해 힘겨운 생활을 꾸려 나간다. 그녀는 끊임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자칫하면 감정 과잉의「여인 수난사」로 전락할 법한 이야기를 자보는 철저하고 냉정하게 추적한다. 두 여인의 몰락을 통해 그는 오늘날 동구사회가 앓고 있는 도덕적·정신적 황폐 감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실감케 한다. 전혀 다른 시대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에게 이 작품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역사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예기치 않은 상처에 대한 그의 깊은 탄식 때문일 것이다. <임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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