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진기자의오토포커스] 차가 주인인 길, 사람이 주인인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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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오늘은 걷고 싶은 도시와 자동차의 상관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은 폭 100m에 달하는 서울 광화문 앞 대로를 보면 입이 쩍 벌어집니다. “땅도 작은 나라에서 한국인의 스케일 한번 엄청나게 크구나” 하는 감탄이 아닙니다. 거리의 흉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도요타로 유명한 일본 나고야시 중심가에는 광화문 넓이(폭 100m)만 한 큰길을 1960년대 만들었습니다. 나고야는 도요타의 본거지라 다른 도시에 비해 자동차에 관대합니다. 주차 딱지도 잘 떼지 않고 길도 널찍하다고 일본인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도로가 완공된 뒤 자발적인 시민운동이 벌어졌습니다. 100m 도로 한가운데를 자동차가 아니라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거리 공원으로 만들어 달라는 제안이었죠. 나고야시는 시민들의 의견을 수용해 도로 양 옆 4차로씩 남기고 폭 50m에 길이 1㎞가 넘는 거리 공원을 만들었죠. 지금 이곳은 나고야 시민들에겐 없어서는 안 될 ‘간이 휴양소’ 입니다. 서울의 청계천 복원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죠. 복원 공사 이전에는 교통 대란이 일어날 거라는 우려가 많았지만 지금은 없어서는 안 될 도심의 휴게소가 됐지요.

 기자가 2005년 프랑스 파리 근교의 르노자동차 디자인 연구소를 탐방했을 때의 기억입니다. 르노 디자인팀은 신차 개발에 앞서 컨셉트카를 세계 각국의 랜드마크 도로 위에 올려놓고 잘 어울리는지 고민합니다. 물론 가상현실로 말입니다. 돌을 박아 만든 로마의 길, 유적이 살아 숨 쉬는 아테네의 고풍스러운 길, 프랑스 알자스 시골의 한적한 길, 뭐 이런 거죠.
 
세계 자동차 디자인 트렌드를 이끄는 BMW의 디자인 총괄 임원 크리스 뱅글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동차 디자이너의 가장 큰 고민은 앞으로 20년을 내다보고 디자인하는 것이다. 5년 뒤 나올 신차 디자인이 아니다. 완성차가 나와 세계 곳곳에서 15년은 굴러다닌다. 시간이 흘러도 그 차가 도로에 잘 어울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움직이는 흉물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단순히 잘 달리는 날쌘 차를 디자인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도로와 어울리는 차가 가장 좋은 디자인이라는 것이죠.

 그럼 한국의 도로와 자동차 문화는 어떨까요. 한국은 잘 포장된 넓은 도로를 보유한 국가입니다. 걸어다니는 사람은 불편해도 차가 붐벼 길이 막히고 민원이 나오면 열심히 길을 넓혀 줍니다. 반면 일본이나 유럽에 가면 대부분 도로는 왕복 2차로가 될까 말까 한 좁은 길입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교통 정체는 별로 없습니다. 한쪽 편에 짐을 두거나 불법 주차를 할 경우 통행이 어렵기 때문에 아예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죠. 우리나라는 토목국가여서 그런지 통상 이런 길을 번듯한 왕복 4차로로 넓혀 버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생각보다 교통 흐름이 좋아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새로 만든 가장자리 두 차로는 대부분 불법 주차나 도로 앞 상점의 창고로 쓰여 소통을 가로막습니다.

 원로 도시학자인 고 강병기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시의 활력이란, 자동차 소통이 쭉쭉 빠지는 게 아니라 보행자 개개인의 걷기가 만들어내는 에너지다. 차를 타려 해도 일정한 곳까지 걸어가야 한다. 걷고 싶어도 걸을 만한 길이 없다면, 또 걸으면서 불편하고 불쾌한 마음을 느낀다면 그건 걷고 싶지 않은 도시가 된다.”

 중앙일보는 최근 걷기를 테마로 한 워크홀릭(WALKHOLIC)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자동차는 장거리 이동을 하거나 레저에 활용하고 사람이 바글바글한 도심은 걷기 편한 보도를 잘 만들어 줘야 차에서 내려 걷고 싶은 도시가 됩니다. 이런 게 우리가 꿈꿔야 할 선진 도시, 선진 한국이 아닐까 합니다.

김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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