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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美 헤지펀드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6호 21면

이탈리아계 랄프 치오피(51)는 미국 베어스턴스자산운용의 헤지펀드 매니저다. 그는 저금리 자금을 빌려다 서브프라임(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채권이 많이 섞인 모기지담보부증권에 베팅해 지난해까지 3~4년 동안 평균 20%의 수익을 거둬들였다. 저금리 시대에 경이로운 채권투자 수익률이다. 그는 수퍼스타로 등극했다.

“베어스턴스 사태는 큰 위기 막을 예방주사”

지난해 하반기 베어스턴스자산운용이 ‘구조화채권 신용전략 펀드’와 ‘구조화채권 차입전략 펀드’를 개설하면서 그를 총괄 책임자로 임명한 것은 바로 그의 명성 때문이었다. 그는 모기업인 투자은행 베어스턴스 고위 임원이 포함된 투자자들에게서 6억 달러를 유치했다. 여기에다 씨티그룹ㆍ바클레이스ㆍ메릴린치ㆍ골드먼삭스ㆍ도이체방크 등에서 90억 달러를 빌렸다. 자기자본의 15배나 되는 차입금이다.

치오피는 저금리 상황이 계속될 것으로 보고 돈을 빌려 모기지담보부증권을 대거 사들
였다(맨 위 그림). 투자은행 자산담보부증권 세일즈맨들은 그의 사무실 앞에서 줄 서 기다려야 했다. 잠시나마 그를 ‘알현’해 최근 발행한 증권을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지난해 이 수퍼스타의 연봉은 650만 달러(약 62억원)였다.

그러나 치오피는 주택시장이 가라앉으면서 발생한 올해 초 서브프라임 사태로 일격을 맞았다. 당시로선 링 바닥에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금리 흐름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지난 6월 중순부터다. 연 4%대였던 미국 재부무 10년 만기 채권 수익률이 5%대로 진입했다. 서브프라임 사태로 맞은 상흔이 덧났다. 손실률이 무려 20%에 육박했다. 자기자본을 다 까먹고 남은 것은 빚뿐이었다. 사실상 파산이었다. 모기업인 투자은행 베어스턴스는 긴급 자금 32억 달러를 투입해 살려보려고 기를 쓰고 있다.

벤 버냉키 FRB의장

■헤지펀드 매니저 떨고 있다=전 세계 헤지펀드 매니저들은 금리의 미세한 떨림에도 긴장하고 있다. 금리가 조금만 올라도 자신이 제2 또는 제3의 치오피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다.

요즘 미국을 제외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긴축 고삐를 죄는 바람에 장기금리가 단기금리를 밑도는 ‘그린스펀의 수수께끼’가 풀리고 있다. 장기금리가 단기보다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미 재무부 10년 만기 채권 수익률은 4%대에서 5.2% 선으로 상승했다. 이런 금리 상승이 헤지펀드의 새로운 역할과 맞물려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최근 헤지펀드는 ‘금융시장의 리스크 종말처리장’으로 구실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투자은행이 발행한 고위험 모기지ㆍ자산담보부증권 등의 최후의 인수자일 뿐만 아니라 사모펀드가 추진하는 기업 인수에 자금 제공자로 구실하고 있다. 리스크 전가 순위에서 보면 투자은행과 사모펀드 등이 떠넘긴 위험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마지막 금융장치다. 이런 쓸모 때문에 골드먼삭스 등 대형 투자은행과 블랙스톤 등 사모펀드들은 2003년 이후 경쟁적으로 헤지펀드를 자회사로 설립하거나 사들였다.

이는 헤지펀드가 1949년 처음 미국에서 등장한 이후 환율ㆍ주가 재정거래(아비트러지)와 공매도 등의 기법으로 수익을 챙기며 구축한 ‘첨단 금융장치’라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물론 현재도 원유ㆍ곡물ㆍ귀금속ㆍ예술품 시장에서 게임하는 헤지펀드는 여전히 많다. 하지만 종말처리장 성격이 강화된 것이 요즘 헤지펀드다. 이는 몸통(투자은행)을 보호하기 위한 꼬리(헤지펀드)로 활용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사태 확산되나?=베어스턴스 사태가 발생하자 사모펀드들이 긴장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텍사스-퍼시픽ㆍ블랙스톤ㆍ칼라일 등 미국의 초대형 사모펀드들이 호주 유통업체인 콜스를 인수하는 딜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최근 시장금리 상승으로 인수자금 조달에 돈이 많이 든다는 게 이유였다.

속사정을 보면 헤지펀드들의 몸사림이 있다. 금융회사는 사모펀드에 기업 인수자금을
꿔주고, 이 돈을 받을 권리(채권)를 투자은행에 팔아 리스크를 전가한다. 투자은행은 여러 군데에서 사들인 이런 채권을 섞어 재분류한 뒤 증권을 발행해 헤지펀드에 팔아넘기는 게 요즘 게임의 공식이다. 서브프라임 처리와 같은 메커니즘이다.
그런데 베어스턴스 사태가 발생하자 헤지펀드들이 자금을 대지 않으려 하고 있다. 헤지펀드의 종말처리 기능이 작동하지 않으면서 금융시장 전반의 리스크 관리 시스템이 마비될 수도 있다.

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있다. 비우량 일반 기업의 회사채 발행도 영향을 받고 있다. 국내 기업인 기아자동차는 미국에서 달러표시 채권 발행을 추진했으나 28일 전격 연기했다. 기아차의 신용등급은 투자적격 등급 중 최하위인 ‘BBB-’다.

■94년 오렌지 카운티 스캔들과 비슷=전문가들은 베어스턴스 사태와 지난 94년 오렌지 카운티 사태의 비슷한 점에 주목하고 있다. 두 사건 모두 저금리 지속에 베팅했던 펀드들이 뜻밖의 금리 상승에 일격을 맞아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때 연준은 91~92년 경기침체를 치유하기 위해 3%까지 낮춘 기준금리를 1년6개월 가까이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많은 펀드매니저는 연준의 저금리 정책이 계속되리라 보고 차입금을 동원해 상대적으로 고수익을 얻을 수 있는 미 군소도시의 채권을 사들였다.

그런데 당시 연준 의장인 앨런 그린스펀이 94년 2월 전격적으로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했다. 금리는 95년 초 6% 선까지 올랐다. 저금리를 탐닉하며 과도하게 채권을 발행한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가 이자를 갚지 못하게 됐다. 결국 수많은 헤지펀드 등이 무너져내렸다.

■찻잔 속 태풍 vs 시스템 위기=헤지펀드의 위기가 금융시장 전반의 위기로 확산되는 것은 아닐까. 미 예일대 경영대학원의 리언 메츠거 교수는 지난주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어떤 사모펀드가 기업 인수 과정에서 빌려쓴 돈을 갚지 못하면 수많은 헤지펀드가 위기를 맞고 M&A 관련 금융시장에서 신용경색이 발생할 수 있다. 그 여파로 글로벌 금융시장이 급격히 얼어붙을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강력한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도미니크 콘스텀 크레디스위스 투자전략가는 “80년대 정크본드 파동이나 90년대 오렌지 카운티로 수많은 헤지펀드가 무너졌다”며 “그러나 금융 시스템이 붕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콘스텀 같은 이들은 미 연준이 기준금리를 인상하지 않으면 시장금리 상승 폭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경우 M&A 시장에서 베어스턴스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실제로 연준은 28일 공개시장정책위원회(FOMC)를 마치고 발표한 성명서에서 인플레이션 압력이 최근 줄고 있다고 진단했다. 아직은 물가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는 말을 덧붙여 시장의 기준금리 인하 예단을 경계하기는 했지만 무게중심은 인상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었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사설에서 “글로벌 금융시장은 위기를 감내할 만큼 튼튼하다”며 “서브프라임과 베어스턴스 사태는 연준이 올해 금리를 내릴 기회를 잡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위기가 오히려 더 큰 위기를 막는 예방주사일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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