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판결] 바지 한 벌이 6700만 달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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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12면

미국 거주 한인 세탁업주 정진남(사진 왼쪽·오른쪽은 부인)씨 등 3명을 상대로 한 ‘바지소송’의 청구 금액이 6700만 달러나 돼 화제가 됐다. 더구나 소송을 낸 사람은 현직 워싱턴 DC 행정법원 판사였다. 국제적으로 뉴스의 초점이 됐던 이 소송은 지난달 25일 워싱턴 DC 지방법원 주디스 바티노프 판사가 “세탁소 주인 정씨가 워싱턴 소비자보호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림으로써 일단락됐다.

정씨 세탁소의 고객이던 로이 피어슨 판사는 2005년 바지 수선을 맡겼는데 정씨가 바지를 분실하고도 적절한 보상을 거부했다며 소송을 냈다. 워싱턴 소비자보호법 위반으로 6500만 달러를, 그 외 민사상의(관습법상의) 손해배상으로 200만 달러를 청구했다.

피어슨의 6500만 달러 계산 공식은 이렇다. 소비자보호법상 법 위반자에 대해 위반행위 한 건에 하루 1500달러를 요구할 수 있는데 위반행위가 12개, 피해를 본 기간은 1200일이다. 여기에 정씨를 포함해 피고가 3명이다(나중에 피어슨은 청구 금액을 5400만 달러로 낮췄다).

피어슨이 소비자보호법 위반이라고 주장한 근거는 정씨의 서비스가 만족스럽지 않았고, 바지를 돌려받는 것도 지연됐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세탁소 입구에 붙여놓은 ‘고객만족 보장’ ‘당일 서비스’라는 문구가 일종의 사기행위이고 소비자들을 오도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바티노프 판사는 “합리적인 고객이라면 ‘고객만족 보장’ 문구를 고객의 불합리한 요구까지도 상인이 만족시켜야 한다고 해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시해 피어슨의 주장을 일축했다. 또 정씨 등이 바지를 잃어버렸다는 피어슨의 주장도 믿기 어렵다고 배척했다. 이제 피어슨은 5000달러가 넘는 소송 비용과 정씨의 변호사 비용 10만 달러를 물어줘야 할 판이다.

우리나라에서 세탁물 분실을 이유로 유사한 소송이 벌어지면 얼마나 배상받을 수 있을까? 아마 바지 값 정도를, 그것도 감가상각한 금액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특별한 행사에 입어야 할 옷이고, 세탁소 주인이 그런 사정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다면 특별손해가 인정돼 추가로 배상받을 수 있을 뿐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소송만능주의에 기초한 소송의 남용을 견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특히 법률 전문가인 판사가 소송을 냈다는 점이 시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미국 사법제도의 맹점을 세계에 드러낸 부끄러운 일이라고 자책하는 교수도 있다.

미국의 소송제도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나 개별법에 의한 천문학적인 손해배상금액 청구가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실제 손해와 무관한 상상하기 어려운 금액의 손해배상 판결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정거래법이나 기업 관련 집단소송제도와 관련해 강력한 손해배상의 방법으로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하자는 논의가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조차 우려의 목소리가 많다는 것은 생각해 볼 점이다.

강상진 변호사 김&장 법률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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