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간 동안 마시는 프랑스 와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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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29면

며칠 전, 집 근처의 맛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와인을 가져가 모처럼 디너를 즐기기로 했다. 어떤 와인을 고를지 고민하다가 이탈리아 음식과 맞추자는 생각에 ‘팔레오 로소’ 2000년산을 들고 갔다.
이 와인은 2001년부터 카베르네 프랑을 100% 담은 와인으로 새롭게 태어났지만, 2000년산은 카베르네 소비뇽의 비율이 70%인 장기 숙성형 와인이었다. 사실 이 와인을 고른 것은 내 실수다. 나는 2000년산도 카베르네 프랑이 100%인 줄로 착각하고 ‘디캔팅을 한 번 하면 마실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치명적인 착각이었다. 글라스로 가볍게 테이스팅해보니 어찌나 떫은지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다. 카베르네 소비뇽이 70%나 들어갔으니 당연하다. 레스토랑, 그것도 프랑스 요리보다 일찍 식사를 마쳐야 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이같이 견고한 와인을 가져온 것을 통렬하게 후회했다. 바로 디캔팅을 요청했지만 한 번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동석한 친구도 “아직 떫어. 언제까지 기다려야 열릴까?”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이다.

정말이지, 와인을 잘못 고르면 즐거운 식사를 망치게 된다. ‘팔레오 로소’ 2000년산은 품질은 좋지만 중후하고 장대하게 설계된 와인이라 본연의 장점을 맛볼 수 있기까지 기나긴 시간을 요한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소믈리에가 하는 말, “저 와인은 내일쯤에나 마실 만하겠지요.” 내 생각도 그랬다.
프랑스의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코스 요리를 2시간 넘게 차례차례 조금씩 몇 접시로 내놓는다. 얼마 전 취재를 다녀온 부르고뉴의 별 한 개짜리 레스토랑에서는 다들 저녁을 밤 8시 넘어 시작해 자정까지 오래도록 먹었다.
한국인도 그러하겠지만, 일본인의 입장에서 볼 때 저녁을 4시간에 걸쳐 먹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물론 프랑스는 지금 서머타임을 적용하고 있어서 10시쯤까지는 환하기 때문에 밤이 깊었다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당연히 와인도 거기에 맞춰 느긋하게 마셨다. 이런 식의 슬로 페이스라면 견고한 와인도 맛있게 열리게 된다. 본격적인 프랑스 요리에는 역시 프랑스의 고전적인 장기 숙성형 와인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비행기 안에서 제공하는 와인은 짧은 식사에 딱 어울리는 것들이다. 프랑스로 출장가면서 이용한 항공기의 비즈니스 클래스에서는 프랑스 서남부 랑그도크 지방의 가볍고 약간 단맛의 와인과, 부르고뉴 중에서도 신맛이 적고 다가가기 쉬운 ‘메르퀴레’ 같은 와인을 내주었다. 둘 다 가격이 싸고 캐주얼한 와인으로 병마개를 따자마자 바로 열리기 때문에 빨리 마실 수 있어서 기내식의 속도에 아주 잘 맞았다.
집에서 마시는 거라면 ‘열릴 때까지 기다린다’는 느긋함도 가능하겠지만,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실 때 맛의 마리아주(프랑스어로 ‘결혼’이란 뜻으로 와인과 음식의 궁합을 비유한 말)만 생각한다면 나처럼 실수를 하고 만다. 맛 이상으로 ‘와인이 열릴 때까지의 시간’과 ‘식사 시간’을 마리아주시키는 것은 중요하다. 번역 설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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