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이자는 연 10% 넘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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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삼국시대 농촌에서는 장리(長利)가 가장 흔한 이자율이었다. ‘장리’는 흔히 이율 50%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조금 더 높다. 그 시대에는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수확기에 곡식을 장리로 계산해 받았다. 굳이 만기일을 따지면 약 9개월에 50%다. 월로 계산하면 5.56%, 연리로 계산하면 놀라운 숫자가 나온다.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려본 사람은 소름이 끼칠 만한 숫자인 약 66%다.

당시 고리(高利)로 곡물을 빌렸다가 빚을 못 갚은 소작농은 노예가 되거나 감옥에 갔고, 처자를 팔아 갚거나 자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669년에 백성들에게 빚 탕감과 이자면제 조치를 내렸다’는 내용이 있다. 669년은 고구려가 망한 다음해다. 당시 민간에서 고리대가 심했다는 방증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고려 땐 ‘이자가 원금 못 넘게’

고려시대에도 고리대의 피해는 심각했던 모양이다. 우선 고려 정부가 취한 조치부터 살필 필요가 있다. 980년에 경종은 연 이자율을 원금의 3분의 1로 정했다. 약 33%(민주노동당이 현 대부업 이자율을 두고 ‘고려시대만도 못하다’고 비판하면서 제시했던 이율)다.

실제로 고려시대 일종의 장학재단인 광학보(불교에 입문해 정진하는 사람을 돕기 위해 정부가 설치한 기관)는 일반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는 이자로 운영했다. 기록에 따르면 광학보는 쌀 15두를 빌려주면 5두, 옷감 15척이면 5척의 이자를 받았다고 한다. 이자는 1년에 한 번씩 냈다. 33%의 높은 이자다.

하지만 백성들 사이에 이자율이 너무 높다는 원성이 일자, 성종은 즉위 원년(982)에 유명한 ‘자모정식법’을 도입했다. 자모정식법은 일종의 ‘이자제한법’으로 납부한 이자의 총액이 원금과 같아지면 더 이상 이자를 받지 않고 원금만 갚도록 한 법이다. 이자가 원금을 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이 규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기록에는 ‘이중생리(利中生利)’라는 복리이자가 성행해 이자가 원금의 몇 배가 됐고, 정부가 운영하는 ‘보(寶)’ 등에서 고리대가 성행했다. ‘배식(培息)’이라 해서 이자율이 100%인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최충헌이 사원이나 보의 고리대를 금지시켰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후에도 고리대는 끊이지 않았다.

고려시대 사원의 금융기관인 ‘장생고’도 일종의 고리대로 변질됐었다. 사원의 논밭에서 수확물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던 장생고는 나중에는 썩은 쌀을 대여하고, 수확기에 새 쌀을 받기도 했다. 때문에 고려 숙종은 1101년 장생고의 기본 자산을 은과 베로 바꾸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묵고 썩은 쌀을 대여해 결과적으로 고리대를 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특히 12세기에는 상업이 융성하면서 일부 상업자본이 고리대 자본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이때 부를 쌓았던 지주나 상인들은 사찰 흉내를 내며 고리대로 재산을 불렸다. 나라가 정한 이자율도 지키지 않았다. 결국 1188년 명종은 ‘부호들이 고리대로 백성들에게서 빼앗은 토지를 돌려주라’는 영을 내리기에 이른다.

이는 일시적인 효과가 있었지만,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재야 역사학자인 이이화씨는 이에 대해 “고리채를 그대로 인정한 데다 이자율을 낮추는 개혁책이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고려시대 역시 ‘고리대’는 매우 유력한 재산증식 수단이었던 셈이다. 조선시대에는 조선후기 ‘환곡’이 대표적인 고리대 폐해로 역사 교과서를 장식하고 있지만, 초기부터 줄곧 고리대가 존재했고, 이를 막으려는 노력 역시 끊이지 않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흔히 ‘성군(聖君)’으로 불리던 임금들은 하나같이 고리대를 걱정하고, 이자를 낮추려는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세종이 대표적이다. 세종은 매우 강력한 이자제한법을 시행했다. ‘공사를 막론하고 이자는 연간 10%, 월 이자는 3%를 넘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물론 고려시대 ‘자모정식법’과 같이 이자가 원금을 절대 초과할 수 없다는 ‘일본일리(一本一利)’ 원칙도 고수했다.

심지어 월 이자로 이득을 취하는 것까지 막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그것까지 막으면 가난하고 약한 자는 빌려 쓸 곳이 없어 폐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종은 ‘사창(社倉)’이라고 해서 무이자는 아니지만 아주 낮은 이자로 곡물을 빌려주는 제도도 마련했다. 사창은 이자 없이 곡식을 빌려줬다가 재정이 바닥났던 기존 ‘의창(義倉)’을 보완한 정책이다. 정책금융의 실패를 거울삼은 사창은 실제로 고리대가 줄어드는 효과를 거뒀다고 한다. 이후 성종 역시 이자를 제한하는 조서를 내렸다는 기록도 있다.

오늘날 ‘마이크로 크레딧’ 도입이나 ‘서민 금융’ 활성화 요구에도 여전히 66%, 55%, 30%를 놓고 저울질하는 정치인들이 반면교사로 삼을 대목이다.

영조 땐 이자가 연 2할 못 넘게

조선 중·후기로 가면서 고리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조선시대 농촌에서 가장 흔했던 이자율은 5할이었다고 한다. 특히 조선시대 후기로 갈수록 ‘이자 놀이’가 극성을 부리면서 월 3~10%의 고리대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연리로 36~120%나 되자 조선 정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자 제한령을 내렸다.

1717년 숙종은 이자율에 대한 제한령을 내렸다. 이때는 거래가 현물에서 화폐로 이행하면서 돈 놀이가 성행했던 때다. 숙종은 돈이나 베는 연 2할, 곡식은 5할을 넘지 못하도록 어명을 내렸다.

이후 영조는 돈이나 곡식 구분 없이 이자율이 연 20%를 넘지 못하도록 했고, 이 제한령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됐다고 한다. 특히 연 2할의 이자 역시 3년 이상 받지 못하게 해 이자가 원금의 6할을 넘지 않도록 했고, 이후 어떤 이자를 막론하고 1년 이상 이자를 받을 수 없도록 했다.

이는 연리 33%라면 3년까지만, 50%라면 2년까지 이자를 받고 더는 못 받도록 하는 ‘자모정식법’ ‘일본일리’ 정책보다 강력하게 백성을 보호하려는 시도였다. 특히 이자에 대한 복리 계산은 나라에서 엄격하게 금했다고 한다. 참고로 조선 정부가 국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발행했던 공채의 경우 조선 초기 이자율은 1할, 후기에는 2할 정도였다고 한다.

일제 시대는 일본의 자금이 들어와 ‘무전대금업(無典貸金業)’이 성행했다. 심지어 담보 없이 돈을 빌려주고, 부친이 사망하면 재산을 물려받아 갚으라는 경우도 있었다. 이율은 월 15%, 연리로 180%나 됐다. 200% 안팎 하는 불법 사금융의 요즘 이율과 비슷하다. 광복 직후에는 ‘사설무진’이 무담보신용대출을 무기로 고리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후 1962년 최고 이자율은 4할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한다는 ‘이자제한법’이 30년 넘게 운용되다가 1998년 폐지되면서 ‘사채 시장’을 중심으로 월 30%는커녕 월 90%에 이르는 초고리 사채업자까지 등장했다.

그리고 지난 3월 이자제한법은 최고 이율 66%와 등록 대부업 활성화를 골자로 부활됐지만, 웬일인지 온 국민이 ‘대부업체 광고 로고송’을 무심코 따라 부르고 경제인구의 3분의 1이 이곳에서 돈을 빌려다 쓰는 고리대의 나라가 됐다.

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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