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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도박과 도전은 종이 한 장 차이”

중앙일보

입력

이코노미스트“바로 청와대로 갔지요. ‘동아콘크리트 대표이사인가 고문인가 주면서 추천 받으라고 하는데 전화 한 번 걸어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각하한테 말씀 드렸더니 그 자리에서 ‘잘 좀 챙겨봐 주시오’라고 전화를 해요. 명예회장님이야 더 바랄 게 있었겠어요? 태어나서 대통령 전화 처음 받아본다고 말이지. 최원석 회장도 ‘그것 봐라. 내가 데려온 사람이 이 정도다’하면서 좋아하고.”


최원석 회장은 리비아 정부가 공식 입찰 발표도 있기 전에 ‘동아의 힘’을 과시하는 일종의 시위를 했다고 한다. 대규모 장비를 동원해서다. 대형 공사 수주 순서로 볼 때 사우디아라비아 전화 공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리비아 대수로 프로젝트는 1980년대 초의 일이고, 동아가 급성장하기 시작했던 것은 사우디 정부가 발주했던 통신공사의 전화 케이블 TET프로젝트를 따내면서였다. 이 프로젝트도 유럽과 미국의 대결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외교전이 치열했던 국제 공사였지만 동아가 수주했다.

동아는 70년대 초부터 괌에서 출발해 사우디·이라크 등 중동지역에서 80여 개 공사 40억여 달러를 수주하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지만 TET 공사는 수주 경쟁에서 가장 열세에 놓인 업체였다. 국력을 등에 업은 치열한 외교전에서 밀렸기 때문이었다.

입찰 결과 발표를 앞둔 77년 9월 14일, 타임과 뉴스위크가 미 국무장관이 미국 건설업체들을 지원하기 위해 리야드에 도착한다고 대서특필할 정도였다. 결과는 동아에 낙찰이었고, 그 배경에는 사우디의 마호메트 왕자와 최 회장의 친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70년대 후반까지도 사우디의 전화 사정이 그렇게 열악했습니까?
“정말 엉망이었지요. 60년대 한국보다 열악한 정도였으니까요. 최고급호텔에서도 국제전화 한 번 하려면 2~4시간씩 기다려야 연결이 됐나? 그러니 사우디 정부인들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1차 오일쇼크 이후부터 오일 달러가 무섭게 들어오니까 사우디 정부가 제일 먼저 숙원사업을 해야겠다고 나선 게 TET공사였지요. 그게 13억 달러짜리 공사니까 뭐. 그걸로 동아가 살이 쪘습니다, 사실은. 하여간 그때 한창 급피치를 올려 마무리 단계였으니까 대형장비들을 빼내도 별 차질이 없겠다 싶어서 리비아로 막 실어 보낸 겁니다. 배짱 좋았지, 핫핫핫.”

▶ 지난 1991년 최원석 회장이 리비아 벵가지에서 열린 리비아 대수로 1단계 공사 준공식에서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와 환담하고 있다.

“명예회장님까지 반대”

그랬다가 수주도 못하고 리비아에서 웃음거리나 되고 하면 어쩌려고 그랬습니까?
“그런 도전도 없이 어떻게 20세기 최대 공사라는 대수로 공사를 넘봅니까? 남들은 도박이라고 했지만 나는 도전이라고 했어요. 사실 건설 바닥에서는 도박과 도전이 결과에 따라 달라져요. 성공하면 도박이 도전으로 평가되고 실패하면 도전도 도박을 걸었다고 폄하하더구먼. 그건 건설을 해보지 않은 언론을 포함해서, 바깥 사람들이 간사하게 금방 평가를 했다가 금방 폄하를 했다가 그러는데 나는 그런 거 신경 안 썼어요, 도전을 한 겁니다.”

최 회장이 TET 성공을 등에 업고 대수로 프로젝트에 야심 차게 도전을 했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부분이다. 실제로 리비아 시장은 도전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한국과 리비아가 인연을 맺은 것은 78년 대우건설이 벵가지에 건설한 가리우스 의과대학 신축공사를 수주하면서였다.

그때부터 리비아는 중요한 해외건설 시장으로 떠올랐고 대수로 공사를 수주하기 직전까지 한국 기업이 수주한 공사만 250억 달러, 230여 크고 작은 현장을 한국의 건설업체들이 누비고 있었다.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을 합쳐 수주액 기준으로 540억 달러어치를 수주한 사우디 시장 다음으로 리비아가 큰 시장이었던 것이다. 이런 잠재력이 보이는 시장에서 1단계 공사만 33억 달러에 달하는 대규모 공사가 발주된다는 데 가만 있을 최 회장은 아니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명예회장님(부친인 최준문 회장을 일컫는다)부터 반대를 하시고 공산당 패거리들이 득실거리는 그런 나라에 뭐 먹을 게 있다고 들어가느냐고 말이지요. 중역들한테는 얘기도 꺼내지 못하게 할 정도로 부정적이셨는데 내 생각은 그런 시장을 먹어야 진짜 살이 찔 것 같단 말이지요. 그러고 좌우간 국내 건설 시장 가지고는 고스톱 판에서 동료끼리 나눠먹는 것하고 똑같은데 뭐가 되겠습니까. 해외에서 승부를 걸어야 된다는 생각이 꽉 차 있었던 겁니다. 그게 리비아 진출의 배경입니다.”

그러나 ‘다른 주장’도 있음을 주목해야 했다. 이 시점에 등장하는 인물이 김교련 동아콘크리트 사장이었다. 그는 외부에서 영입한 인물이었고, 동아가 주요 계열사 사장을 전문 분야가 아님에도 갑자기 외부인으로 영입한 전례가 없었다는 점에서 최 회장과 김 사장의 관계를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김교련 전 사장을 인터뷰했다.

장군으로 예편했고, 특히 대공 분야에서 군(軍)의 독보적인 인물로 명성을 날렸던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최 회장님하고는 어떤 인연으로 알게 됐고 동아에 영입된 계기는 뭡니까?
“허허, 저는 지금도 군인 정신을 버리지 못해 꾸밀 줄도 모르고 사실 그대로를 전부 까발려 버리니까 필요한 것만 걸러서 쓰세요. 제가 보안사 대공처장으로 있던 71년, 청와대 특명을 받고 고위층 자제, 재벌들 자제, 사회 명사 아들, 그런 사람들에 대한 병무 부정 사건을 취급했습니다. 대공수사처장이다 보니 대통령 특명을 받고 사건을 취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때는 상업은행장 이모씨 아들, 중정 차장 아들, 탤런트와 놀아난 종교인 박모씨 아들 등등,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건 정보부·보안사·경찰·국방부 등 사방에서 철저히 조사해 확실한 범죄 구성요건이되는 사람을 청와대에 올렸는데,거기서 딱 밀봉을 해서 50여 명이 내려왔지요. 그중 한 사람이 최 회장이었습니다.”

병무비리 둘러싼 각하 특명

병무 부정 사건을 조사한 것이 인연이 됐군요.
“그런 셈인데, 인연이라면 좋은 뜻으로 말하는 거 아닙니까? 오히려 악연으로 만난 거지요. 조사를 했으니까요. 그때는 지위고하가 없습니다. 서빙고 분실에서 옷 싹 갈아입히고 아주 무섭게 합니다. 그러고 제가 어떤 사람인가를 잘 알고 있으니까 누구도 저한테 손을 쓰겠다고 밖에서 다리를 못 놨어요. 그럴 때 잡혀온 친구 중 최 회장이 나이도 그나마 제일 많고, 스물여덟인가 아홉인가 그랬는데, 제가 워낙 철저하게 조사하니까 나한테 직접 오지는 못하고, 밖에서 걱정이 되는지 여기저기 나에 대해 알아보고 다닙디다. 그럴 거 아닙니까? 돈 있고 빽 좋은데. 하여간 그런 일로 최 회장을 만났으니까 인연이라면 인연이지요.”

동아 쪽에서는 별도로 알아볼 것도 없이 당시 처장이었던 사장님을 잘 아는 사람이 있었을 텐데요?
“아, 유영철씨라고, 당시 동아그룹 최준문 명예회장님의 비서실장으로 있었지요. 나중에 사장과 부회장을 지냈습니다만. 그 사람이 5·16 나고 합동수사본부에서 사병으로 근무했었기 때문에 저를 잘 알죠. 어쨌거나 병무 부정 사건이 터져서 벌집 쑤셔놓은 듯이 온통 세상이 시끄러울 때 만난 거지 그 전에는 몰랐지요.”

최 회장님을 조사했다고 해서 대표이사로 영입이 되겠습니까? 뭔가 특혜를 주셨던 건 아닙니까? 최 회장님이 단순 군 미필이었습니까?
“단순 군 미필이라면 저한테까지 안 오지요. 하여간 기록을 전부 드릴 테니까 묻지 말고 그걸 보세요. 제가 동아콘크리트 사장을 지냈는데 괴롭잖아요, 허허. 기록을 보면 전부 다 나와 있습니다. 제가 다 작성했던 거니까 틀림없고. 그걸 제 입으로 얘기한다는 게 쑥스럽고 어색하지 않습니까, 허헛. 특혜라고까지 할 것은 없고, 어쨌든 최 회장은 처음에 무종을 받았는데 건강하다는 것이 뒤늦게 들통나는 바람에 저한테 왔지만 나이가 많았어요. 그래가지고 제가 직접 각하한테 올라가서 4주간 훈련을 받는 것으로 재가를 받고 석방시켰지요. 그때 재벌가는 자식들 호적에 빨간 줄 오를까봐 전부 난리였지만 각하 특명이기 때문에 입소 안 하고는 방법이 없고, 약식 훈련으로 조치하는 게 최선이었어요.”

그 후에 최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온 겁니까?
“그 사건이 71년이었고, 제가 77년 초에 예편을 했으니까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지요. 그러고 동아하고 관계를 말하려면 이게 중요한데, 그 당시엔 장군으로 예편하면 누굴 막론하고 정부에서 사후 보직을 3년 정도 줍니다. 감사 자리를 주더라도 다 줘요. 자랑 같습니다만, 저는 국가 안전보장 민족상 제1호고, 대한민국에서 간첩을 가장 많이 잡은 사람이고, 훈장을 십수 번 받고, 청와대 보고를 수없이 하고 그랬기 때문에 일 자리는 당연히 준다고 했기 때문에 집에서 대기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동아에 가지 않아도 정부기관에 인사 이동만 있으면 최우선 순위였네요?
“그랬는데 하루는 최 회장 비서실장인 이 부장이 찾아왔어요. 최 회장이 골프나 하잖다고. 그때야 최 회장 안부를 물으니까 놀고 있다는 겁니다. 깜짝 놀라서 알고 보니까 5월께 난리가 났던 거예요.”

사장님은 예편한 이후가 되지요?
“물론이지요. 예편을 했으니까 몰랐고, 관심도 없었고. 벌써 6~7년이나 흘렀잖습니까. 그런데 신문에도 터지고 대통령께도 보고되고 난리가 났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체크를 해보니까 최 회장이 4주 훈련을 안 받은 겁니다. 물론 해외 공사 때문에 왔다갔다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했지만 대통령 재가까지 받아서 4주 훈련으로 처리해 줬고, 4주로 한 것도 대통령 특명입니다. 그런데 안 받았다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각하한테 보고되는 순간 회장직에서 물러난 겁니다. 하여간 뭐 놀고 있는 사람이지만 오랜만에 만나니까 반갑기도 했는데 결론은 동아에서 같이 일을 하자고 그래요. 자기도 놀면서 뭘 같이 일을 하자는 건지, 허허허. 좌우간 저는 정부에서 주는 보직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런 얘기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건설을 뭘 안다고 동아에 가겠어요. 그런데도 집념이 여간 아니에요. 최 회장 집념, 보통 아닙디다? 아주 집요해요. 정부 발령 날 때가 됐다고 해도 소용없어요. 그러다가 결국 두어 달 됐나? 오전 10시에 만나자고 해서 갔더니 명예회장님 앞으로 데려가요. 최준문 명예회장이죠. ‘김 장군하고 같이 일하기로 했습니다.’ 딱 그렇게만 얘기를 합디다.”

명예회장님하고 사전에 협의가 됐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모르지만 그 자리에서 ‘동아콘크리트 대표이사 사장 고문’으로 발령을 냈어요. 사장은 주총을 열어야 하니까 일단 고문으로 내요. 정신이 멍하죠. 그러고는 동아콘크리트가 서울 도봉구 창동에 있었는데 즉각 명예회장님이 저를 태우고 창동으로 가요. 들어서자마자 그전 사장한테 그만두라고 말이지, 그 자리에서 그래요. 개인회사라 그런지 무섭기도 합디다. 그게 반나절 만에 끝나요. 그렇게 한 것이 동아하고 인연이고 시작입니다.”

대통령 전화 처음 받은 회장

최 회장님은 회장직에서 물러난 상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회장이 공석인 상태에서 저는 발령이 난 거지요. 그것도 뭐 사연이 많은데 하여간 그렇게 되니까 최 회장도 최 회장이지만 제가 각하한테 면목도 안 서고 못 견디겠어요. 사실 각하께서 재가를 하실 때 하신 말씀이 있거든요. 저를 굉장히 아껴주셨는데, 4주로 처리하도록 해 주십시오 했더니 ‘잡아넣어서 본보기를 보여야지 무슨 소리야. 자네가 이 자를 알아?’ ‘전혀 모릅니다! 기업을 하는 사람이니까 경제 발전을 위해서 기회를 한 번만 더 주자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내 어깨를 탁 치시면서 ‘기특한 소리구먼, 열심히 하라고 해.’ 이러셨다고요. 그러니 내가 괴롭지요. 면목도 안 서고. 그래서 최 회장을 끌다시피 해서 52사단에서 4주간 교육을 다 받도록 하고 그때부터 다시 회장으로 복직시켜야 되니까 보안사다 청와대다 쫓아다니면서 마무리를 지은 겁니다.”

명예회장님도 좋아하셨겠군요.
“후유(왜 한숨을 쉬는지 이유를 묻자 나중에 얘기하자고 했다). 동아콘크리트 사장 고문으로 발령을 내고는 다음 다음날 명예회장님이 저를 부르더니 어디 가서 추천을 받아오라는 겁니다. 대표이사 되려면 높은 양반 추천을 받아야 한다는 거죠. 기업을 그런 식으로 운영해 나가는가 싶기도 했지만 그때는 동아만이 아니라 큰 회사들이 거의 그런 인맥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야 청와대에서 대통령한테 수십 번 브리핑을 하고 보고를 한 사람이니까 청와대로 갔지요. ‘동아콘크리트 대표이사인가 고문인가 주면서 추천을 받으라고 하는데 전화 한 번 걸어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각하한테 말씀 드렸더니 그 자리에서 대번 전화를 걸어주세요.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데 군에 오래 있어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를 테니 잘 좀 챙겨봐 주시오.’ 그러니 명예회장님이야 더 바랄 게 있었겠어요? 깜짝 놀랐다, 그러고 태어나서 대통령 전화 처음 받아본다고 말이지. 그렇게 되니까 최원석 회장도 ‘그것 봐라 말이지. 내가 데려온 사람이 이 정도다’ 그러면서 좋아하고. 그런 다음에는 대통령 보시라고 신문에 광고를 내서 동아콘크리트 선전하는 사진에다 제 사진과 이름을 싣고 그럽디다.”<계속>

이호·객원기자ㆍ작가 leeho52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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