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극기 훈련|과보호 울타리 "단숨에 훌쩍"|중 의사 변영호 씨 주관 어린이캠프 동행 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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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오늘은 날씨가 춥지 않아 별로 힘들지도 않은 걸.』
지난5일 오전 5시30분쯤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앞 시냇물에서 한 뼘 두께나 되는 얼음을 깨고 알몸으로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온 일곱 살 짜리 문규가 사뭇 으쓱한 표정이다. 섭씨 영하13도. 짜릿하도록 시린 물 속에서 스물까지 세는 사이 어제 쌓인 피로가 말끔히 씻겼는지 몸이 날아갈 듯 가뿐하고 상쾌해지자 그「큰일」을 해낸 자신이 꽤나 대견스러운 모양이다. 하지만 동생뻘인 네 살 짜리 조차 거뜬치 해낸 일인지라 입 밖에 내 자랑할 수가 없다.
젖은 몸을 닦지도 않은 채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며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은 터라 잰걸음으로 숙소인 여관에 돌아와 한숨 달게 잔 뒤 오대산 국립공원 앞 식당에 모인 것은 오전8시30분. 누나들만 넷을 둔 아버지가 50이 다 되어서야 낳은 외아들 문규는 집에서라면 숟갈도 댈리 없는 산나물과 된장국밥상이 그저 반갑다. 여기저기서 밥을 더 달라는 소리가 요란한걸 보면 모두들 문규 만큼이나 꿀맛인 모양이다.
오전11시에 네 살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전국각지에서 모인 남녀 어린이와 청소년 1백 명이 상원사 아래서 비로봉을 향해 출발할 때 나눠 받은「점심」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건빵 한 봉지와 귤 한 개. 먼발치로나마 자녀나 조카의 극기훈련모습을 지켜보며 자신들도 심신을 단련하겠다고 이 프로그램(3∼10일 오대산 일대)에 참가한 40여명의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관련화보 11면)
전날 오후 월정사 뒷산을 누비는 산행훈련 때까지만 해도 앞서가는 엄마·아빠를 부르며 힘들다고 호소하던 유치원생들조차 가파른 산길을 아무 군말 없이 잘도 오른다.
길이 점점 가파르고 험해지자 비로봉을 1.5km쯤 앞둔 산중턱에서 유치원생 이하의 어린이들을 하산시키려 할 때 여섯 살 짜리 영준이는 형들과 함께 끝까지 오르겠다며 눈물로 호소하는 바람에 결국 소원을 이뤘다. 가루눈이 흩날리는 가운데 해발 1천5백63m 비로봉 정상에 올라 가슴이 확 트이도록 『야-호』를 외친 것이다.
눈바람 속에 우뚝 서서 윗 옷을 또 한차례 벗어 젖힌 채 목청껏 소리치고 난 일행은 아무 부러울 것 없다는 듯 환한 얼굴들. 물 한 모금 없이 귤로 목축이며 건빵을 씹지만 아무도 목메는 법 없이 그저 맛있다고 야단이다.
발아래 펼쳐진 겨울 산의 절경에 취한 탓인지, 아니면 불과 며칠 새 길러진 자신감과 체력 때문인지 선두가 일부러 멀고 험한 길을 골라 산을 내려가기 시작해도 좀더 쉬어 가자는 등의 불평 한마디 없다.
하기야 곤히 잠든 새벽 한 시건 네 시건 아랑곳없이「변 도사」로 통하는 변 영호씨(41)의 호령이 떨어지면 어느새 밖으로 뛰어나와 얼음 물 속에 몸을 담그는가 하면 얼어붙은 눈밭을 맨발로 달려온 터에 그 정도로 앓는 소리를 낸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방 정리를 제대로 안 했다느니 너무 늦게 모였다는 등의 핑계(?)로「변 도사」와 조교들은 한밤중에도 팬티 바람으로 한바탕 뛰게 만들기 일쑤지만 콧물·재채기·동상 따위로 고생하는 어린이가 한 명도 없다(사실은 피로를 풀어주거나 협동심을 길러 주기 위해 고의로 시키는 일이지만 어린이들은 호된 벌을 받는 줄 안다).
중국에서 동양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유럽에서 연수하고 돌아온 중의사 변 씨가 처음으로 이 극기훈련캠프를 연 것은 지난 87년.『소 자녀 가정이 늘고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턱없이 나약하고 이기적이며 무엇하나 고마운 줄 모르는 채 자라는 우리 아이들을 보며 정말 큰일났다 싶어 몇몇 아는 사람들의 자녀 40여명을 데리고 이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됐다』고 그는 말한다. 매년 여름·겨울 방학마다 이 캠프를 열고 있는데 점점 희망자가 늘어나 이제는 1백 여명 규모로 커졌다. 원래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시작했으나 미취학 어린이를 보내는 일부 보호자들이 함께 참가하기를 강력히 원하는 바람에 성인 참가자도 자꾸 늘고 있다. 대부분의 보호자들은 이 훈련프로그램을 따라 하는 것보다「천하에 귀한 내 아이」가 고생하는 걸 보면서도 냉큼 달려가 도와준다 든 가 참견하지 않고 꾹 참는 게 더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된 훈련을 놀랍도록 잘 소 화해 내는 것을 보며 자녀의 무한한 능력에 놀라고, 앞으로는 불필요한 과보호로 자녀의 잠재력을 오히려 위축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감·책임감·집중력이 생기고, 잔병치레며 편식 버릇이 없어졌어요. 이 캠프덕분에 처음 배를 곯으면서 음식에 대한 고마움도 알게 됐 구요. 그래도 꽤나 힘들어서 다음 번엔 안 오겠다고 벼르곤 하지만 다시 방학이 가까워지면 은근히 이 캠프가 기다려집니다.』
형(16)·동생(12)을 포함한 삼 형제가 여덟 번째 이 캠프에 참가해 왔다는 홍성훈 군(15· 서울 방배중 2)은 앞으로 이 캠프의 조교가 되고 싶다고 덧붙인다. <오대산=김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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