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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영빈칼럼

누가 ‘완장’ 차고 거들먹거리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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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 칼럼을 쓰기 시작한 게 19년 전 일이다. 6월 항쟁으로 민주화 열기가 치솟고 광주항쟁 진상 규명을 위한 광주특위 청문회가 열리던 무렵이었다. 이 무렵 기업주는 강성 노조를 향해 엽총을 들고 대항했고 노조는 새로 임명된 사장을 냉큼 들어 밖으로 몰아내기도 했다. 대학생들이 스승을 스승 같지 않다고 달려들어 스승의 머리를 홀랑 깎아 버린 일도 벌어졌다. 대학생들이 전경을 납치하면 동료 전경들이 캠퍼스로 쳐들어가 강의실과 도서관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법정에선 판결에 불복한 피의자가 법대(法臺) 위로 뛰어 올라가 재판관의 판결문을 찢어 버리는 무법천지 세상이었다. 폭력 시위로 해가 뜨고 붉은 머리 띠의 집단 시위로 해가 졌다. 1988년 11월 상황은 이랬다.

그때 쓴 칼럼이 ‘어느 좀팽이의 작은 소망’이었다. 폭력의 사자가 어느 날 느닷없이 코이너씨 집에 쳐들어와 먹고 자고 시중들기를 강요한다. 코이너씨는 묵묵히 폭력의 사자를 보살피며 7년을 복종한다. 폭력의 사자는 너무 많이 먹고 잠자고 명령만 하다가 뚱뚱해져 죽어 버린다. 시체를 이불에 말아 집밖으로 던지며 코이너씨는 그동안 참았던 말, ‘싫다’를 내뱉는다. 독일 극작가 브레히트 산문 ‘코이너씨의 이야기’는 군사 독재에 살았던 우리들 좀팽이들 삶과 다를 바 없다고 보았다. 폭력의 사자에 기죽고 숨죽여 그나마 선량하게 살아온 말없는 다수를 겁주는 또 다른 폭력이 거리에서, 직장에서 넘쳐나고 있다. 사자의 폭력도 싫고 들쥐의 폭력도 싫다. 섣부른 좌경을 흉내 내지 말고 섣불리 좌경을 충동질하지 말라고 했다. 그나마 간신히 마련한 집 한 칸 부수려 들면 금방이다. 오순도순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쳐 가며 사는 게 좀팽이들의 작은 소망이라고 했다.

20년 세월이 흘렀다. 우파 민주화 세력이 5년, 좌파 민주화 세력이 10년 정권을 잡았다. 일견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광주를 찾아도 돌멩이가 날아들지 않고 적어도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뚝 끊어진 것은 변화 중 가장 큰 변화다. 민주화 지도자들이 줄줄이 국정 요직에 앉았고 거리의 전사들마저 국회로, 청와대로 들어갔다. 집권 좌파정권이 쏟아낸 이런 개혁, 저런 개혁 속에서 말없는 다수는 개혁 멀미와 피로증에 시달려야 했다. 살림은 피어나지 못하고 줄어들기만 했고 가족 3대가 백수로 건달처럼 살아가는 세태가 됐다. 집 한 칸 간수하지 못하고 거리로 나앉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 권력에도 화끈하게 아부하지 못했고 저 권력 대열에도 서 보지 못한 숱한 좀팽이들은 좌파 정권의 민주화 ‘완장’에 기죽어 살아가고 있다.

민주화 혼란 초기에 있을 법한 일이 지금 국정 최고 지도자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피의자가 판사의 판결문을 찢어 버리듯 대통령이 헌법기관인 선거관리위원회의 결정을 찢어 버리고 개인 명의로 헌법소원을 내는 기상천외의 혼란을 자초하고 있다. 한 번 대통령은 영원한 대통령이다. 국정 최고 지도자이기에 선거의 중립을 지켜야 하고 대통령이기에 자중자애의 보이지 않는 구속과 절제를 감수해야만 한다. 대통령이 언론을 탄압하면 그게 독재고 나쁜 대통령이다. 이 정부 들어 야심 찬 계획으로 내세운 게 신문법 개정이었다. 비판 신문엔 족쇄를, 우호 신문엔 지원을 아끼지 않는 해괴한 법이다. 이것도 모자라 기자실 통폐합 작업을 추진 중이다. 대통령이 비판 신문을 증오의 대상으로 삼은 결과다. 20년 전에도 이런 악법은 없었다.

증오의 대상을 이분법으로 가르는 게 좌파정권의 특징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못 배운자, 우호세력과 비우호세력, 강자와 약자로 명백한 선을 긋는다. 1백50여 대학총장을 앞에 두고 대통령이 기자ㆍ정치인ㆍ교수를 완장 차고 거들먹거리는 강자로 정의했다. 저소득층 자녀를 대학정원 외로 뽑으라는 지시를 협박하듯 총장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정원 외 기여입학이 무리이듯,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대학에 들어간다는 것은 좌파 포퓰리즘의 극치다. 20년간 기죽어 살았던 좀팽이들의 작은 소망은 이젠 절망과 체념으로 바뀌고 있다. 좌파 포퓰리즘과 완장 찬 좌파 정권의 독선, 그리고 또 다른 형태의 독재에 가위눌려 살고 있다. 이들의 작은 소망은 언제 이뤄질 것인가.

권영빈 논설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