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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행진' 준비하는 키다리 아찌의 연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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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삼씨는 중앙일보 e-칼럼 코너에 '키다리 아찌의 나누며 살기'를 연재중이다.

"마무리보다는…아쉬움이나 미련 같은 건… 없어요. 이제부터 시작인데…뭐가 아쉬워요. 노래 가사에도…있잖아요… '미련을 두지 말아요'라고. 흐흐…."

한마디 한마디 발음하기조차 힘들어 하는 그였지만 유머 감각은 여전했다.

뇌성마비 1급 장애인 이종삼(37)씨. 2003년 인터넷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를 빛낸 스타 필자인 그를 다시 만났다. 지난 9월 말 인터넷 중앙일보에 e-칼럼 '키다리 아찌의 나누며 살기'를 연재하면서 인터뷰한 지 석 달 만이다.

그의 말마따나 나이는 내일 모레면 불혹이지만 진정한 자기 일을 찾은 지는 겨우 2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그다. 뇌성마비 장애를 안고 태어난 이씨는 8세가 되기까지 앉지도 기지도 못했다. 글을 깨친 것도 15세가 넘어서였다. 1985년 처음 손에 넣은 컴퓨터를 통해 세상과의 대화를 시작, 2년 전 소년소녀가장들을 돕던 단체인 '참빛'과 인연을 맺으면서 오프라인 세상에도 얼굴을 드러내게 됐다.

지금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바쁘다. 소년소녀 가장들의 '희망지기', 휠체어를 탄 '키다리 아찌', 프로그램 직접 개발해 히트친 '컴퓨터 도사'…. 이씨를 부르는 많은 애칭들은 그의 바쁜 일상을 설명해준다. '참빛'을 모체로 지난해 3월 발족한 경기도 동두천시의 지역봉사단체 '희망천사 운동본부'(www.hope1004.org)에서 그는 회계와 소식지 편집, 홈페이지 관리 등을 맡고 있다.

"너무 많은 일이…너무 빨리 지나가서…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신이 없어요. 흐흐…. 아무튼…인터넷 신문에 칼럼두 쓰게 되구…한마디로… 촌놈이 출세했죠…흐흐…."

그는 운동본부에 도움을 청했던 이웃이나, 넉넉치 않아도 나눔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무런 꾸밈이나 과장없이, 그러면서도 따뜻하게 써 보내왔다. 폭력 남편과 이혼한 뒤 혼자 아이를 낳고 어렵게 살아가는 한 여성의 처지를 다룬 '미혼모를 구출하라!', 피붙이라곤 할머니 밖에 없는 초등학생 남매를 후원하는 27세의 패션디자이너에 관한 '어느 처녀 엄마 이야기' 등이 그랬다. 그런 그의 글에 네티즌들은 "우리 사회의 반딧불이고 싶은 모든 이들이 이 글을 보았으면 합니다" "'키사모'(키다리아저씨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만들고 싶네요"라며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개인적인 아픔들도 칼럼을 통해 기꺼이 공개했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존재'란 글에서 이씨는, 그에게 세상 밖으로 나오고 컴퓨터를 배울 용기를 줬지만 술만 마시면 어머니에게 폭력을 가하던 이중적인 모습의 아버지에 대한 애증을 담았다. 또 '똥 그리고 희망'에선 불편한 몸으로 화장실도 없는 지하사무실에서 일하느라 겪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윗층의 화장실조차 남자 자원봉사자의 도움이 필요한 일반 수세식이라 몰래 바지에 싼 채 집에 다녀오곤 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그는 오히려 유머러스하게 적어 네티즌 독자들의 코 끝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최초의 뇌성마비 장애인 칼럼리스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여전히 존재했다. 일부 네티즌들이 "이젠 야들(비정상 군상들)까지 나서야 되는 떨거지 세상이 됐군"하고 비꼬는가 하면 일부 표현을 트집잡아 비난, 이씨의 가슴에 또 한번 상처를 주기도 했던 것이다.

"세상에… 많이 알리고… 공감할 수 있었다면…만족해요. 제 얘기도…많이 하는 건…이제 나를…노출시킬 때가 됐다고…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언제까지나…이 지하실에 있을 수만은…없잖아요. 하나하나…껍질을 벗으려는…과정일 거에요. 하지만…가족들에겐 피해가 없을까…걱정돼요."

많지는 않아도 칼럼 원고료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사주는데 제법 유용했다고 한다. 비상금으로 약간 모아두었던 돈도 얼마 전 딱한 처지의 만삭 여성을 위해 다 털었다. 말 그대로 '나눔의 삶'이다. 더 나눠줄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불경기라는 걸 감안해도 이번 겨울은 너무 썰렁하다고 했다. 천사본부가 최근 1천4백만원의 예산으로 난방비 지원을 시작했는데, 신청 가정이 너무 많아 방문조사를 통해 20가구를 선정하는 데만 1주일이 걸렸단다.

최근엔 사무실 건물 앞에 세워놓았던 그의 스쿠터까지 도난당했다. 지난 9월에 잃어버렸다가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것을 찾아왔는데 또 누가 가져간 것이다. 일반인들에겐 답답할 정도로 느린 스쿠터지만 그에겐 바깥 활동을 위해 꼭 필요한, 분신과도 같은 존재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그 스쿠터를 가져간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길거리에 버리지 않을, 정말로 그게 필요했던 사람이 가져갔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내년에도 그가 해야할 일은 많다. 천사본부의 '누구나 집'프로젝트는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일이다. 소년소녀 가장과 장애인 가족 등을 대상으로 한 사랑의 집짓기 운동이다. 독지가의 도움으로 부지는 확보했지만 첫삽 뜨기부터 도울 자원봉사자들을 모으는 건 이제부터라고 했다.

"열심히…내 자리를 지키자…이 자리에서…내가 맡은 일…열심히 하면 된다…그렇게 생각해요…흐흐…."

희망을 잃지 않는 그의 웃음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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