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윤흥길 작|금간 동이 테 메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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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웃 찾기-작가가 쓰는 사회면」을 연재합니다. 우리 이웃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작가가 콩트형식으로 엮는 이 연재는 농민·상인·주부·노동자·셀러리맨 등 우리주변 인물들의 모습, 애환 등을 통해 우리 사회의 단면을 그려 나갈 것입니다.「작가가 쓰는 사회면」이라는 부제가 보여주는 것처럼 날카로운 사회풍자·고발이 담기며 또한 웃음이 있음으로써 우리의 삶을 풍요하게 꾸며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 연재에는 우리 문단의 역량 있는 작가들이 참여합니다. <편집자 주>
만일 다사다난 이란 말이 당초에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한 해를 마감할 때마다 대관절 무슨 재주로 묵은 세월을 적당히 뭉뚱그릴 수가 있었을까. 세밑을 맞아 사람들은 저마다 벅차게 보낸 자신의 지난날들을 정리하면서 약속이나 한 듯이 같은 타령, 같은 가락으로 회고하는 묘한 버릇을 사면팔방에서 드러내곤 했다. 별수 없는 김달국씨 또한 그런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
정말 그랬다. 어느 핸들 다사다난하지 않은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을까 마는, 올해는 특히 더 그랬다. 국가적으로도 그랬지만 달국씨 개인적으로도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참으로 사건도 많고 어려움도 많은, 그래서 몹시도 고단하게 보내야만 했던 한해였다. 그만하면 때울 액 대강 다 때운 셈이라고 치부하면서 저도 모르게 긴장의 끈을 늦추는 막판의 그 허점을 노려 불쑥 들이닥친 최근의 사건이 뭐니뭐니해도 달국씨에게는 가장 치명적이었다. 그때의 그 불상사만 떠올릴작시면 달국씨의 입에서는 짙은 한숨과 함께 유행어투가 절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도대체 선거가 뭐 길래….』
선거가 문제였다. 나라 전체가 들썩거릴 지경으로 한바탕 요란뻑적지근하게 치른 대통령선거가 한 가정의 평화와 단란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었다. 삼파전을 예고하는 막 강 후보들간의 치열한 경쟁이 어쩌다 방향을 잘못 들어 약 비한 달국씨의 집안에까지 뛰어들어서는 이날 이때 빳빳이 살아 있던, 혹은 빳빳이 살아 있다고 자부하던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우지끈 부러뜨려 그만 두 동강 내고 말았다.
난생 처음 겪는 횡 액이었다. 어디 선거 한두 번 치러 본 솜씨 던 가. 투표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이래 달국씨 집안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적당한 때를 잡아 가장인 달국씨가 기호 몇 번을 찍으라고 지시하면 그만이었다. 만일 지시가 없을 경우 박행분 여사는 누구를 찍어야 되느냐고 자청해 남편에게 묻곤 했다. 그야말로 일사불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사정이 달랐다.
다름 아닌 진범이 녀석 때문이었다. 성년에 이르러 처음 투표권을 갖게 된 큰아들이 끼어 드는 바람에 달국씨 집안의 선거분위기는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버렸다.
『당신, 요번 선거에는 왜 조언을 구하지 않지?』
선거일을 이틀 앞둔 저녁식탁에서 달국씨는 언뜻 생각난 김에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에멜무지로 물었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요.』
행분 여사는 예사롭게 대담했다. 그러나 달국씨 한 테는 결코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뭔가 심상찮은 조짐이 집안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그는 그제야 어렴풋이 나마 깨닫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제가 알아서 혼자 결정했거든요.』
햐아, 요 마누라쟁이 좀 봐라. 달국씨는 식탁 주변에서 솔솔 피어오르는 반역의 역한 냄새를 맡으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결정했다고? 가장인 나한테 물어도 안 보고.』
『인제는 박행분이도 철이 들만큼 들었으니까요.』
이를테면 홀로 서기의 선언인 셈이었다. 달국씨는 기가 막혔다. 그러나 아직은 서너 단계쯤 더 참아 줄 아량이 있었다. 그는 주먹덩이처럼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그 무엇을 꾹 누르며 입가에 비웃음을 대롱대롱 매달았다.
『그래 그 철든 머리로 점찍은 후보는 뉘 신고?』
『2만 불 소득을 장담하는 후보를 선택하기로 했어요.』
『그건 안돼!』
엉겁결에 달국씨는 마누라를 향해 쥐고 있던 숟갈을 흉기처럼 똑바로 겨누었다. 그러자 행분 여사는 눈을 칩뜨면서 정색을 했다.
『왜죠? 안 되는 이유가 뭐예요?』
『2만불이 뭐 뉘 집 강아지이름인 줄 알아? 애당초 실현 가능성이 의심스런 공약일 뿐만 아니라 2만불 소득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야.』
우리는 중산층이다. 중산층이 오로지 고소득에만 연연한 나머지 2만 불이란 신기루에 온통 넋을 팔아서야 되겠는가. 그것은 중산층 체면에 관한 문제다. 우리는 중산층 수준에 걸맞게 배부른 삶보다는 당연히 품위 있는 삶 쪽을 선택해야 된다. 달국씨는 입에 거품을 물어 가며 중산층으로서의 지녀야 할 올바른 정신자세를 한바탕 역설했다.
『우리한테는 안정 속의 개혁이 최고란 말씀이야. 중산층답게 우리는 그걸 부르짖는 후보를 힘껏 밀어 줘야 된단 말씀이야.』
그만큼 알아듣게 타일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떨떠름한 낯 꽃이었다..
참 잘난 중산층, 당신 혼자서나 실컷 하세요. 저는 서민층 하겠어요. 당신이 뭘 몰라서 그래요. 가계부를 안 써 봐서 요즘 월급쟁이들 살림이 얼마나 힘들고 팍팍한지 모르는 탓이라고요.』
『뭐가 어쩌고 어째?』
달국씨는 하마터면 식탁 위의 유리판을 숟갈로 내리칠 뻔 했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그는 자제심을 발휘했다. 가장으로서의 체통을 생각해 아직도 두세 단계쯤은 더 참아 낼 용의가 있는 그였다.
『엄마한테 너무 강요하지 마세요.』
그때까지 옆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진범이 녀석이 제법「대갈통 여문 티」를 낸답시고 불쑥 입을 열어 제 어미를 역성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부부지간이라도 특정 후보 지지를 강요하는 건 명백히 선거법에 저촉되는 행위라고요.』
『옳거니, 바로 네놈이었구나.』
늘 고분고분하던 마누라가, 생전 않던 짓거리로 갑자기 가장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서는 품이 여전히 수상쩍다고 아까부터 그러잖아도 이상하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녀석이 제 어미한테 나쁜 병균을 옮겨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 결과라고 멋대로 단정해 버렸다. 나는 야 바바리코트의 신사가 제일 맘에 늘더라.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저희끼리 눈치코치도 없이 쑤군덕거리는 둘째아들 종범이와 고명 딸 향옥이를 향해 무섭게 눈을 부라려 입을 다물게 한 다음 달국씨는 본격적으로 큰아들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대학 물 좀 먹었다고 벌써부터 유세냐? 순진한 엄마를 살살 꼬셔서 허황된 꿈이나 꾸게 만드는 것이 그래 대학생 자식으로서 할 도리냐?』
『엄마가 누구를 지지하든 그건 엄마의 자유고 권리니까 아버지도 엄마 생각을 존중해 주셔야 합니다.』
『오라, 그러고 보니 너도 2만 불에다 투표할 작정이구나.』
『지지자를 공 표하는 행위 역시 선거법 위반에 해당되기 때문에 절대로 밝히지 않겠습니다.』
『애비의 자격으로 엄숙히 명령한다. 누굴 찍을 건지 당장 밝히거라!』
집안분위기가 갑자기 살벌해졌다. 두 어린 것이 수저 질을 중단한 채 겁에 질린 낯 꽃으로 아비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못 밝힐 것도 없지요. 저는 범 민주후보를 찍기로 결심했습니다. 변화와 개혁은 시대의 요청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꼭 바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쪽은 꿈도 꾸지 마라.』
『어째서 아버지 꿈만 정당하고 엄마나 제 꿈은 부당합니까?』『몰라서 묻냐? 급격한 변화는 혼란만을 부르기 때문이다. 이 나이에 이만큼이나마 누리고 사는 안정을 나는 하루 아침에 잃고 싶지는 않다.』
스스로 중산층임을 자부하는 달국씨는 단호하게 말했다.
『쌓아 놓은 게 별로 없으니까 세상이 뒤집어진들 변변히 잃는 것도 없는 살림인데 뭐가 그리 겁나세요?』
『웬 잔말이 이리도 많아? 가장이 한번 방침을 정하면 모두들 찍소리 없이 순종할 줄 알아야지. 요번 대 선에서 우리 김씨 집안은 안정 속의 개혁 쪽을 택하기로 가론을 통일하는 거다.』
『통일할 게 따로 있지요. 민주주의 하자는 마당에 각자자기 의견을 버리고 어느 한쪽 명령대로 따른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아버지!』
『말이 되고도 남는다. 이놈아! 혈육으로 똘똘 뭉친 우리 가족이 정치적 견해 하나 제대로 통일 못하고 제각각 뿔뿔이 흩어져서 제 갈 길만 고집하는 그 꼴이야말로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작이다.』『그럼 선거는 왜 치르고 토론은 또 뭣 때문에 필요한 겁니까?』
역대 어느 선거에서도 경험한 적이 없는 비극적 사대의 한복판에는 역시 대학생아들놈이 완강하게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한두 번 정도는 너끈히 더 참아 줄 뭐가 남아 있는 달국씨였다.
『니까 짓 게 정치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감히 애비 면전에서 따따부따냐? 여러 소리 말고 애비가 바꾸라면 냉큼 바꿔, 이놈아!』
『좋아요. 아버지 뜻이 정 그러 시다면, 바꾸지요.』
그러면 그렇지, 하고 달국씨는 마음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웬걸, 큰아들의 입에서 나온 그 뒷말은 너무도 뜻밖의 것이었다.
『바꾸긴 바꾸되 검정 두루마기의 혁명가로 바꾸겠습니다.』
『뭐가 어째, 이놈아?』
아, 무슨 일인가. 단란하게 시작된 한 가정의 저녁식탁에서 방금 어떤 불상사가 벌어졌는가. 뺨따귀에서 울린 철써덕 소리는 이미 사라져 안 들렸다. 하지만 그 뺨따귀를 갈길 때의 느낌은 아직도 손바닥에 얼얼하게 남아 있었다.. 밑의 두 어린 것이「삼베바지에 방귀 새듯」어느새 식탁을 떠나버렸다. 큰아들에게 차마 못할 짓을 했다는 사실을 달국씨는 뒤늦게 깨달았다.
삼파전이 예상되던 대통령선거는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다사다난했던 1992년도 거의 저물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김달국씨 집안의 삼파전은 아직도 팽팽하게 계속되는 중이었다. 폭력 가장을 대하는 가족들의 태도는 여전히 쌀쌀하기만 했다. 언뜻 눈길이라도 마주칠 까 봐 가장과의 대면을 극구 회피함은 물론 철저히 따돌리려는 분위기가 집안에 충만해 있었다.
달국씨는 거실에 홀로 앉아 섣달 그믐의 밤을 외롭게 지키면서 텔레비전을 통해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다. 지난 세월을 기억의 저편으로 멀리 흘려 보내기는커녕 제야의 종소리는 과거의 다사다난을 달국씨의 뇌리에 다시금 새삼스레 각인 시키는 구실만 했다.
선거로 말미암아 좌우로 갈리고 상하로 나뉨으로써 새는 물동이 꼴이 된 집안을 철사로 둘러 감는 과제가 신년 벽두를 맞는 달국씨의 양어깨를 산더미의 무게로 짓누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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