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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담 분위기」를 경계하라(송진혁칼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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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클린턴 미 대통령당선자가 김영삼대통령당선자에게 축전을 보낸다는 외무부의 대외비문서가 민자당에서 발표됐다가 취소된 지난주의 해프닝은 지금 김 당선자가 무엇을 가장 경계해야 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클린턴의 축전발송사실은 우리의 주미대사가 외무부로 알려온 것인데 당선자 참모가 이를 개인적 채널로 입수한 것을 민자당이 발표했다가 문제가 되자 취소했다는 것이다.
○주변 아첨꾼 많게 마련
신문가십의 한토막으로 간단히 넘어가고 말았지만 이 사건은 두가지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가지는 지금 당선자의 주변에는 당선자를 미화하고 기쁘게 하려는 「덕담분위기」,아첨분위기가 조성돼 있다는 사실이다. 외무부의 대외비 문서가 어떻게 당선자 참모에게 넘어갔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누군가가 이 「기쁜 소식」을 당선자측에 재빨리 전해줘 생색을 한번 내보자는 의도가 있었던게 아닌가.
그렇잖아도 상도동과 민자당사에는 줄을 대보려는 사람들로 연일 북적거린다는데 이들이 입만 열면 덕담이요,아첨일 것은 정한 이치다. 그래서 벌써 「각하」라는 호칭도 나오는 것이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또 한가지 측면은 당선자 주변의 중구난방현상이다. 어떤 조직이든 대외적으로 뭔가를 발표하려면 반드시 내부적으로 그 조직의 의사를 결정,확인하는 과정이 선행돼야 하는 법이다. 민자당쯤 되는 큰 정당에서,더욱이 대통령당선자에 관련된 대외비문서를 발표함에 있어 필요한 내부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번 뿐 아니라 대선이후 불과 열흘남짓한 기간에 당선자 주변에서는 실로 엄청난 정책과 구상과 방침이 쏟아졌다.
○벌써부터 「각하」 호칭
자고나면 기획원이 폐지되고,자고나면 안기부가 축소되는 식으로 정부기구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기구개편안에서부터 개혁이다,쇄신이다 하는 온갖 보도가 홍수를 이뤘다. 물론 이중 상당수가 오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선자 주변에서 이런 저런 발언이나 「의욕」과시가 없다면 이런 보도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벌써 일부 인사는 요직자이기나 한것처럼 TV나 신문 인터뷰에 나서 새정부의 방향을 유권적으로(?) 제시하는 판이다.
김 당선자로서는 주변의 이런 덕담·아첨분위기나 중구난방현상은 경계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잖아도 40년 숙원을 달성한 기쁨이 보통이 아닐텐데 주변에서 벌써 「각하」소리가 나오고 줄대려는 자들의 덕담과 아첨에 둘러싸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 김 당선자가 그럴리는 없겠지만 철석같은 사람도 주변분위기가 온통 그렇게 돌아가면 자기도 모르게 교만에 빠지기 쉽고,자칫 「교」가 표출될 경우 칭송이나 기대감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다. 당선자 주변의 중구난방현상의 배경에도 실은 이런 「교」의 분위기가 있는 것은 아닌지,측근과 참모들중 일부라도 「이제 천하를 잡았다」는 교만감이 있지나 않은지 당선자는 잘 챙겨봐야 할 것이다. 아직은 노정부인데 두달도 채 안남은 그 기간을 못참아 기획원을 폐지하고 금리도 내린다는 식으로 뻥뻥 쏘아대면 공무원이 차분하게 일할 수도 없고 기업인들이 안정감있게 투자계획을 짤 수도 없다.
당선자 역시 주변의 이런 문제들을 잘 인식하고 있다고 믿는다. 무분별한 정책발언에 강력한 제동을 걸고 「대변인발표 외에는 모두 사실무근」이라고 발표까지 시킨 것을 보면 당선자 역시 심각하게 느끼는 것이 분명하다.
정부가 제공하는 안가나 방탄차를 사양하고 거창한 당선축하연을 취소한 것도 잘한 일이다. 그러나 새정부의 차별화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새 정부의 2공설을 언급하고 부산사건만 없었다면 서울에서도 1위득표를 했을 것이라는 얘기같은 것은 듣기가 거북했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 당선자는 매우 중요한 시점에 있다. 대선결과로 모처럼 우리사회는 긍정적 분위기가 감돌고,32년만에 육군대장출신이 아닌 민간인출신 대통령이,반생을 민주화투쟁에 보낸 「정치9단」 대통령이 나서 뭔가 대화합의 큰 정치를 보여주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이 드높다. 그러나 이런 한껏 부푼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측근들 언행 신중해야
모름지기 당선자 진영의 모든 언행은 절제돼야 하고 자세는 지극히 겸손해야 할 것이며,각종 행사는 검소해야 할 것이다. 자칫 먹을 것 없는 소문난 잔치가 안되도록 지금 할 일은 현실을 냉정히 파악하고 국민의 기대를 정확히 읽어 개혁구상의 내실을 다지는 일이다. 또 논공행상이나 「광」을 누가 내느냐 하는 것보다는 해야 할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군지를 알아내고 그런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일이다.
선거기간에 당선자가 누누이 강조했던 『가장 큰 적은 우리 내부의 교만』이라는 말은 지금 더욱 딱 들어맞는 말이다. 내부의 자만을 경계하고 주변의 과공과 아첨을 경계하는 것이 중요하다.<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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