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 55. 친구 김기수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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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에 오른 김기수씨가 카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기수는 1년 만에 싱글 핸디캡 수준의 골퍼가 됐다.

 키가 175cm를 조금 넘었던 그는 워낙 힘이 좋아 어깨와 팔로만 채를 휘둘러도 장타가 나왔다. 그런 그가 손바닥에 물집이 잡혔다가 터질 정도로 훈련을 했으니 싱글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머리도 좋았다. 1970년대 초 나는 잦은 해외 대회 참가로 많은 기술을 가르쳐주지 못했는데도 그는 한 가지를 일러주면 금세 다른 것까지 터득했다. 그는 골프 입문 1~2년쯤 뒤에 아예 뉴코리아골프장 회원권을 샀다. 그리고 3년도 안 돼 클럽 대회에서 입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뉴코리아 챔피언도 몇 번 올라 아마추어골프계에서 고수로 이름을 날렸다.

 뉴코리아골프장에서 그와 라운드를 했던 추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함께 라운드를 나갔던 장기섭씨가 “돈을 걸고 치자”고 제안해서 내기가 이뤄졌다.

 나는 김기수에게 9홀에 4점의 핸디캡을 줬다. 1,2번 홀을 지나 3번 홀(파4)에서 김기수의 티샷이 산속으로 날아갔다. 공을 찾느라 한참을 보냈는데 김기수의 가방을 멘 남자 캐디가 속칭 ‘알’을 깠다. 언덕 위 맨 땅에서 였다.

 “공 여기 있다.”
 김기수는 공을 찾았다며 좋아했다. 그러나 알을 까주려면 잘 안 보이는 곳에 놓을 것이지. 캐디는 서툴기 그지없었다. 황토 위에서는 공이 눈에 잘 띄기 때문에 내가 김기수의 공을 찾아 다닐 때 자세하게 둘러봤던 곳이었다.

 “임마! 공에 발이 달려서 돌아다니냐? 좀 제대로 할 것이지”라고 캐디를 나무랐다. 캐디는 머리를 긁적거렸지만, 김기수는 끝까지 우겼다. 그러더니 나중에 “한 번만 봐주면 안 되냐”라고 말했다. 내가 “두 점 벌타를 받아야 한다”고 우겨대자 그는 “한 점만 주겠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한 점으로 타협했다.

 당시 나의 기량은 절정이었다. 내가 4번 홀(파3)에서 버디를 잡는 바람에 김기수는 핸디를 모두 잃고 말았다.

  “너한테는 기권이다.”
 다음 홀 티잉 그라운드에서 그는 손을 들었다.
 나는 “기권하려면 핸디캡을 다 내놔라”고 으름장을 놓아 9홀까지 내기를 계속했다. 전반 9홀에서 나는 3언더파, 그는 6오버파였다.

 그는 “이젠 너하고는 절대로 내기 안 한다. 너무 무서워 신경이 쓰여”라고 설명했다.
 결국 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만 내기를 계속했다. 마음이 편해진 기수는 후반 9홀에서 3오버를 쳐 다른 두 명의 돈을 모두 땄다.

 김기수는 정말 내기에 강했다. 그나마 나는 그와 친구였기에 신경전을 하면서 버텼지만, 다른 사람은 그의 고집에 두 손을 드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는 서로 악다구니를 써가며 내기할 기수 같은 친구가 없다. 점잖게 하는 골프 말고 필드에서 친구끼리 아옹다옹 다투며 내기하는 재미도 있는데 말이다.

한장상 KPGA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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