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입학력고사의 일생”/82년 탄생 93년 폐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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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선시험 후지원→2개대학 지원→1개대학 지원→시험과목 축소→논술고사 추가→선지원 후시험
올해 입시를 마지막으로 10년간 수백만 수험생들을 올리고 기쁨을 안겨주었던 「학력고사」가 과거속으로 사라진다. 82년부터 대학 신입생 선발의 양대 전형자료가 되어왔던 내신·학력고사 가운데 내신은 새 대입제도가 시행되는 94학년도에도 계속 유지되면서 오히려 반영비율이 「30% 내외」에서 「40% 이상」으로 강화되는 반면 학력고사는 대학수학능력시험·본고사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학력고사는 80년 7월30일 교육대개혁 조치로 69년부터 80년까지 장기간 유지되어온 「예비고사+대학별고사」의 대입 틀이 깨진뒤 81년 「내신+예비고사」의 과도기에 이어 82년부터 시행됐다. 예비고사는 원칙적으로 일정한 점수에 이르지 못하면 대입 지원자격을 주지 않는 「자격시험」이어서 「선발시험」인 학력고사와는 성질이 달랐다.
81년부터 87년까지의 학력고사 운영방식은 변화의 연속이었다.
「선시험 후지원」제도가 안고 있는 문제점 때문이었다. 당초 무제한 중복지원이 허용되자 허수지원자가 속출,사상 유례없는 대량 미달사태가 발생하고 급기야 2백점에 훨씬 못미치는 수험생이 서울대법대에 합격하는 웃지못할 해프닝까지 빚어졌다. 이에 따라 82년에는 「2개대학 지원­1개대학 응시」제도와 함께 수험생의 대학·학과선택 자료로 활용토록 한다는 취지로 학력고사 점수에 따른 계열별·남녀별 전국 석차가 발표되기 시작했고 다시 83년부터 「1개대학 지원­같은 대학내 제2,3지망 허용」으로 바뀌었다. 86년에는 수험생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15∼16개에 이르던 시험과목을 9개과목으로 축소시켰다.
86,87년에는 학력고사 외에 별도의 논술고사를 치르기도 했으나 채점의 공정성 시비가 일어 바로 폐지됐다. 이 기간에는 눈치지원·배짱지원이 판치고 학력고사 점수가 대학 및 학과의 서열을 매기게 돼 「높은 학력고사 점수 때문에」원치 않는 대학·학과에 지원하는 체면지원이 나타나는 등 혼란상이 극심했다.
이같은 현상은 86년 11월25일 대입 개혁조치에 따라 88년부터 졸업정원제 폐지와 함께 대입지원 방식이 「선시험 후지원」에서 「선지원 후시험」으로,학력고사가 「국가 일괄 관장」에서 「대학별 실시」로 바뀌면서 다소나마 완화됐다. 학력고사 전국 석차 공개가 없어지면서 학력고사에 주관식 문제가 출제되고 내신 반영비율이 40%에서 30%로 낮아진 것도 이때부터다.<김동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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