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 54. 친구 김기수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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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시절의 김기수씨.

프로복서 고 김기수씨.
 1966년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꺾고 세계권투협회(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에 올랐던 그는 한국인 최초의 복싱 세계 챔피언이자 내 친구다.

 앞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나는 프로골퍼가 되기 전 복싱을 했다. 50년대 국내에서 쌍벽을 이룬 복싱도장은 한국체육관(한체)과 성동체육관(성체)이다. 당시 복싱도장은 지금의 헬스센터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나는 한체에서 운동하다 나중에 집에서 가까운 성체로 옮겼다.

 나는 한체에서 김기수와 함께 운동했지만 서로 체급이 달라 이야기할 기회는 없었다. 나는 밴텀급이었고, 그는 조금 더 무거운 체급이었다. 그는 여수에서 피란 생활을 할 때 복싱을 배우다 서울에 올라와 한체에 다니고 있었다.

 내가 프로골퍼로 성공하고, 그가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에 오른 뒤 우리는 친구가 됐다. 김기수 프로모터의 후원자였던 장기섭씨의 소개로 만나 가까워졌다.

 김기수가 권투를 그만 두기 직전이었다. 함께 한체에 다녔다는 사실을 안 그가 내게 호감을 느꼈던 것 같았다.

 69년 안양컨트리클럽 헤드프로를 그만두고 나는 김복만 프로와 함께 비원 앞에 연습장을 연 적이 있다. 그때 김기수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골프 좀 가르쳐 달라”며 “점심을 살 테니 나가자”고 했다.

 “야 이거 한 그릇으로 어떻게 골프를 가르쳐주냐”고 하니 구두쇠인 그가 “친구 사이에 무슨 돈을 받냐”고 해서 그냥 점심 한 끼로 골프 레슨을 해주기로 약속하고 말았다. 레슨비는 받지 않는 대신 내가 운영하는 연습장에 회원으로 가입하도록 했다.

 김기수는 역시 세계 챔피언다웠다.
 골프에서 끝장을 보기로 작심한 듯 아침부터 밤까지 연습했다. 추운 날에도 캐디가 낚시의자에 앉아 볼을 놔줬다.

 그런데 김기수는 여성 캐디에게 몇 시간씩 일을 시키면서도 사례비를 주지 않았다.
 나는 농담 삼아 “야, 이 자식아 골프를 배우려면 사례비도 좀 주고 그래라. 너 닮은 손님 한 명만 더 있으면 우리 같은 프로골퍼는 굶어 죽겠다”고 핀잔을 줬다.

 어떤 날은 하루 열 시간 정도 공을 쳤다. 단언하건대 만일 그가 복싱 대신 골프를 배웠더라면 세계 골프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나는 틈만 나면 “네가 공을 다 깨뜨린다” “연습장 망을 다 망가뜨린다”고 힐책했다.
 처음엔 “그가 치면 얼마나 치겠냐”고 했던 김복만 프로도 나중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쨌든 나는 김기수처럼 열심히 훈련하는 아마추어 골퍼를 본 적이 없다.
 골프를 잘 하고 싶은 골퍼들에게 ‘골프 실력은 연습량과 비례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프로든 아마추어든 마찬가지다.

한장상 KPGA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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