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의 정치적 영향력 과시/「TV선거」… 이렇게 치러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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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부정위주 보도 정치불신 부추겨/여론외면 TV토론 불발 아쉬움/정치광고 첫선 「세련된 선전」가능성 보여/시청자들 TV유세엔 예상외로 반응 냉담
14대 대통령선거에서 방송이 갖는 정치적 위상이 다시 한번 강력하게 떠올랐다. 대중매체 사회에서 전국민적 관심사인 선거는 이제 TV에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 밖에 없음이 입증되고 있다. 방송 연설의 편성시간만으로도 정당간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할 정도로 선거·정치를 국민과 연결시켜주는 방송의 역할은 일상에 깊이 파고들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후보들간의 TV토론이 불발되고 일부에서 선거보도의 편파성에 대한 지적이 나오는 등 우리의 선거·정치문화가 아직 대중매체시대에 충분히 적응하지 못한 점도 드러났다. 역사적인 이번 선거를 계기로 방송이 우리 정치문화에 미치는 역할과 의미를 종합점검해 본다.<편집자주>
○TV토론
이번 대선에서 선거방송의 꽃이라 할 수 있는 TV토론이 정당간의 승강이만 있고 불발로 그치게 돼 시청자들에게 결정적인 실망을 안겨줬다.
정치적인 군중집회나 후보들의 연설이 일방적인 홍보만을 전달하는 것으로 유권자들의 관심사나 궁금한 점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반면 TV토론은 후보들의 자질과 섬세한 부분에까지 유권자들이 안방에서 편리하게 판단할 자료를 제공하고 다각적인 의견개진을 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크게 기대된 것이었다.
선거법상 TV토론의 주체는 방송사 자신이고,몇차례 실무협의도 벌였으나 성사가 안된 직접적 이유는 정당간의 합의가 안됐기 때문이므로 방송사는 토론 주체로서의 역량이 의심받고 근본적인 한계를 갖는 것으로 지적됐다.
87년에 이어 법으로 보장되어 있고 여론에서도 강력히 원했음에도 TV토론이 불발된 것은 1차적으로 이를 기피한 대통령후보와 정당이 책임을 져야 하나 TV토론이 유명무실하게 되지 않도록 하는 법적·제도적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김기정교수(외대·언론학)는 『특정정당이 토론을 기피하는 것이 토론에 참여하는 것보다 이익된다는 판단이 서게 한 것을 보면 아직 여론의 압력이 정치적 이해관계보다 약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TV토론이 불가능하게 된 원인조차 구체적으로 거론되지 않는 언론환경 자체도 문제』라며 『TV토론을 기피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당한다는 결과를 얻게 해야만 정치인들이 당당하게 TV에서 자신의 전체를 내보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광고
방송위원회의 심의규칙에 의해 금지되어 있는 정치광고가 대통령선거 운동기간에만 예외적으로 허용돼 이번 선거에서 사상 처음으로 선보여 시청자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충격이 되고 있다.
TV와 함께 자라난 세대가 유권자가 되는 나이로 성장했고,CF문화가 일상적인 삶을 지배하는 시대에 아직은 초보적인 수준이나 정치광고의 의미는 군중집회의 바람몰이를 전근대적으로 보이게 하는 주요 매체임을 사람들에게 인식시켜 주었다.
30초라는 짧은 시간에 대통령후보의 이미지와 투표의 향배를 제시하는 정치광고는 직접적·개인적인 접근과 호소로만 홍보하고 상대방에 대한 비방 등 저급한 방법의 선거운동이 판치던 시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한편 점차 정치 무관심·무감각증에 빠져 들어가는 신세대들에게 새로운 호소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등장할 가능성을 열고 있다.
주요 3당이 벌인 대선광고는 『아직 군중집회에서의 연설을 안방에서의 인간적인 호소로 전환시키기에는 미흡한 과도기적 양태를 보이고 있으나 정치선전이 세련된 안방문화로 소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정치광고는 제작비와 방송시간의 확보 등 편당 억원대의 돈이 들 정도로 조직력과 금력을 가진 대정당만이 할 수 있는 정치행위로서 소수당이나 무소속의 혁신적인 목소리는 자본력에 막히게 된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보도태도
이번 대선방송 보도부문은 여전히 판펴보도 경향이 있고,국민의 정치참여를 유도하는 계도성 기획기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반면 부정사례의 과대포장으로 오히려 국민의 정치불신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점이 공선협 등 방송모니터기구들의 지적을 받았다.
다만 변화가 있다면 이번 대선방송에서는 13대때와 같은 노골적인 편파보도가 다소 줄어든 대신 카메라 조작이나 편집과정에서의 기술적인 편파보도가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이런 변화는 그동안 우리사회의 감시기능이 13대때에 비해 많이 향상됐다는 방증으로 사회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앞으로 선거방송의 공정성을 기대하는 역설적인 현상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
이번 대선방송에서 편파보도로 지적된 대표적 사안들은 ▲국민당 금권선거와 03시계 고발관련 보도 ▲민자당 흑색선전물 관련보도 ▲후보의 유세활동 스케치 등을 꼽을 수 있다.
공선협이 지난달 30일부터 12월7일까지 KBS·MBC·SBS 세 TV의 9시·8시뉴스를 모니터한 결과 3사의 국민당 금권선거 고발기사의 비율은 각각 전체기사의 22.4%,26.9%,27.7%를 차지한 반면 03시계 사건은 단신으로 가볍게 처리해 대조를 보이고 있다.
민자당 흑색선전물 관련보도도 신문에서 머릿기사로 다룬 것과 달리 방송3사는 모두 정당간의 성명전 형식으로 취급해 문제의 책임소재를 희석시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각 후보들의 유세 동정기사는 애초에 방송사들이 내부원칙으로 정한 3당 후보 등 시간 원칙이 거의 지켜지지 않고 민자·민주·국민의 순으로 시간이 배분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밖에 정책이나 공약의 비교분석 등 계도성 기획이 거의 없었다는 점도 아직 우리 선거방송이 유권자의 참여를 유도하는 방향의 적극적인 자세보다는 어떻게 하면 문제의 소지를 줄일까라는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TV유세
이번 선거유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지난 13대때와 달리 대규모 군중집회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대신 TV유세와 소규모 집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같은 변화는 대규모집회 중심의 금권선거 풍조 때문에 그간 선거때마다 엄청난 선거비용을 낭비해온 현실에 비추어볼때 바람직한 변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TV유세는 또 전파매체가 지닌 광범위한 파급효과 때문에 집회에 참석하기 어려운 유권자들에게 차분한 분위기에서 후보들의 공약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국민적 호응을 얻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의 TV연설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기대보다 낮았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청률 전문조사기관인 미디어 서비스 코리아의 조사에 따르면 TV연설의 가구시청률은 전체적으로 동시간대 채널 평균시청률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TV연설이 후반부로 갈수록 시청률이 하락추세를 보여 시청자들이 TV연설의 내용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그라프 참조>
이처럼 시청자들이 TV연설에 대해 관심이 낮은 원인은 연설내용이 대부분 후보들의 일방적인 자기홍보가 많아 신뢰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번 TV연설에서 또 하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점은 방송사들이 TV연설을 정치광고로 간주,20분 1회 연설에 7천만∼1억원의 엄청난 채널 사용료를 받고 있기 때문에 자금력이 약한 후보들에게 무거운 부담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김우룡 외대교수는 『현재 우리 선거문화는 집회에서 TV로 옮겨가고 있는 과도기이므로 TV연설내용에 대한 규정마련과 방송횟수 확대,채널사용 무료화 등 포괄적인 TV유세문화의 정착방안을 검토할 시기』라고 말했다.<채규진·남재일기자>
◎시청자 반응/“편파적 보도 많아… TV토론 무산엔 큰 실망”
이번 대선 방송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보도의 편파성을 지적하는 내용이 많았으며 TV토론의 성사를 몹시 기대했지만 무산된데 대해 큰 실망감을 표시하고 있다.
▲신동구씨(23·연세대 사회학과 3학년)=뉴스가 전반적으로 민자당에 호의적인 느낌을 받았다. 특히 국민당 관련보도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것 같다. 방송위원회에서 공정보도 감시 특별심의 위원회를 만들어 감시활동을 강력하게 펴나가겠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공정보도를 기대했는데 실망스럽다.
▲김천수씨(30·제일기획 AE)=이번에 처음 허용한 TV정치광고에 관심이 많아 자세히 봤는데 유권자들에게 정치참여를 유도하는 장점이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정치광고의 허용범위를 넓혀 평소에도 방송이 가능하도록 했으면 좋겠다.
▲권인옥씨(34·주부)=유세장에 나갈 사정이 못돼 TV연설을 많이 시청했다. 어수선한 유세장보다 한결 차분하게 연설을 들을 수 있어 좋은 것 같다. 이왕이면 TV토론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최유진씨(42·인풍비전 기획실장)=TV토론이 무산된데 대해 몹시 불쾌하다. 책임소재를 밝혀 사과를 받도록 해야 한다.
▲설장곤씨(58·상업)=TV토론이 이루어질 것 같더니 왜 성사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유세장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아직까지 집회중심의 유세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답답하다. 다음 선거에서는 반드시 TV토론을 실시하고 TV연설도 늘려 선거문화 자체를 바꿨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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