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들이 생각해야 할 일/김호길(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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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 유럽 여러나라의 고속도로에는 속도제한이 없다. 급한 커브나 경사에는 참고로 안전속도가 표시되어 있으며 안전속도이상으로 주행해 보면 차가 불안정한 것을 운전자가 느끼게 된다. 직선에 가까운 구간에서는 차의 성능이 허락하는 한 마음껏 달리며 벤츠나 BMW가 시속 2백㎞로 마음놓고 주행하는 곳이 유럽의 고속도로다.
○지키기 힘든 선거법
경부고속도로에서는 획일적으로 시속 1백㎞가 제한속도이며 안전속도를 표시한 곳은 없다. 그러나 1백㎞의 제한속도를 지키는 사람은 드물며 직선구간에서는 1백20㎞쯤 달리는 것이 보통이다. 시속 1백20㎞에서도 안전한 도로에 1백㎞ 속도제한을 두었을 때 결과적으로 안전보다는 범법자를 양산하고 법을 지키지 않는 인식을 심어주는 인상을 낳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교통사고가 많을 것 같은 유럽이 도로에 속도제한이 있는 우리나라나 미국보다 사고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속도제한을 없애고 안전에 맡겼을 때 운전자들이 훨씬 더 조심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선거일이 닥쳐왔다. 우리 생활과 국가장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대통령제하의 대통령이다. 따라서 선거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선거가 대통령선거인데 이 선거에 불법이 자행되고 고발사태가 잇따르는 한심한 상태를 보이고 있다. 선거에서 불법사례가 많은 이유를 생각해 보면 우선 선거법이 잘못되어 있고,유권자의 의식수준이 낮으며 입후보자에게 도덕성이 결여된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선거법은 고속도로의 교통규칙이상으로 지키지 않을 법을 처음부터 만든 것 같다. 예를 들면 선거법에 사전선거운동이 금지되고 있다.
그러나 넓게 해석하면 정치인의 행동이 선거운동이 아닌 것이 없는데 어떤 것이 선거운동인지를 규정하기가 힘드는 일이며 사전선거운동을 금지한다고 해 그 법을 실제로 지키고 있는 입후보자는 거의 없다. 이밖에 선거비용의 상한을 정한 것도 지키기 힘든 규정이며 선거운동원으로 등록하지 않으면 선거운동을 못하게 한 것도 문제가 많은 규정이다. 돈이 있는 후보가 금권선거를 생각하고 여당이 관권선거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영국에서는 총선후 4년에서 5년사이에 여당이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한다. 총선에 가까워서는 여당이 할 수 있는 한 인기정책을 쓰게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여당이 이기는 것도 아니며 관권시비도 따르지 않는다. 결국 금권과 관권이 없어지는 날은 유권자와 후보자의 의식과 도덕수준이 높아졌을 때며 우리는 그날을 끈질기게 기다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공정한 선거의 최소조건은 원하면 누구나 입후보할 수 있고 정견발표에서 자유가 보장되며 투표에서 비밀이 보장되고 개표에 부정이 없는 것이다. 이 최소조건을 놓고 보면 지난 선거나 이번 선거는 비교적 공정한 선거의 범위에 속한다. 불법선거가 이번 선거에 많다는 것은 선거법이 까다롭기 때문이며 미국이나 영국에서 합법인 것을 우리 경우엔 불법으로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법사례를 줄이려면 후보자들의 준법정신도 중요하지만 우선 지킬 수 있는 법으로 선거법을 개정하는게 중요하다.
○표에 급급 공약 남발
그러나 선거법이 개정된다해서 바람직스러운 선거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법은 해서는 안될 일,즉 도덕적으로 지켜야할 최하의 선을 정하는 것이며 바람직스러운 선거는 멋있는 후보자와 의식이 높은 유권자를 가졌을 때 이루어진다. 존 F 케네디를 미국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퓰리처상을 받은 그의 상원의원때 저서 『용기있는 사람들(Profiles in Courage)』이라는 말이있다. 국회의원은 선거구민을 대변하고 대통령은 민의에 따라 정치를 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상식이다. 그러나 케네디의 저서는 정치인이 유권자의 뜻에 반하여 소신껏 행동하고 그러고는 낙선한 미국의 대통령과 상원의원들의 행적을 발굴하여 모아놓은 책이다.
전제군주하에서 자리를 위해 군주에게 아부하는 것이 나쁘다면 선거에서 당선을 위해 유권자에게 아부하는 것이 옳은 일일 수 없다. 군주제하에서 목숨을 걸고 군주에게 직간하는 신하가 있을때 나라가 유지되듯 민주제도에서 낙선을 불사하는 후보자가 있을 때 건전한 정치제도가 된다.
특히 대통령은 나라를 이끌어 갈 지도자다. 지도자로서의 인품과 정견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선거운동이 있고 유세와 홍보가 필요하며 선거비용도 있어야 한다. 단상이나 땅바닥에서 신을 벗고 큰절을 하는 것은 유세가 아니고 표를 구걸하는 행위다.
○감투 파는 일 아니다
계층과 지역과 파당과 직종의 집단이기주의에 지킬 수 없는 공약을 남발하는 것도 유세가 아니고 아첨이다. 아첨이나 구걸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아니며 따라서 유권자들은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이 아니고 감투를 파는 기분이며 점심 한끼라도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에게 표를 찍게되는 심정에 이르게 된다. 대중에게 아첨하는 것보다 『나라가 어렵다. 우리 모두 욕구를 자제하고 허리를 졸라매고 다시 뛰자』고 외치는 입후보자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투표일을 앞두고 유권자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투표가 우리 생활에 영향을 미칠 대통령을 선출하는 일이지 감투를 파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다.<포항공대학장·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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