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병」에 탕진되는 선거비용/김원일 소설가(유세현장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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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통령 선거일이 4일 밖에 남지 않았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번 선거의 결과야말로 지역감정의 마지막 표대결,양김 최후의 결전임을 뻔히 알면서도 금기의 그 무엇이듯 어느쪽도 내색을 않는다. 87년 대선때와는 달리 어느쪽 유권자도 겉으로는 덤덤하다. 먼저 흠집을 내는 쪽이 누명을 쓴다는 묵계가 암암리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 앙숙의 양김 사이에 재벌총수가 7순의 정열을 과시하며 심판자리를 팽개치고 선수로 뛰어들었다. 이 정치초년병은 막강한 자금력과 기업조직을 배경으로 이번 대권향방에 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7명의 후보가 나름대로 열심히 뛰고 있지만,그중 2김과 1정이야말로 가위 결사적이다. 선거일이 막바지에 이르러 유권자는 이번 대선에 누구를 찍을 것인지 대충 결정을 했겠으나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한 부동표를 향해 선심과 술수가 난무하고 있다. 겉과 속이 다르고,속이 보이는데도 겉으로는 당당한 사자후의 면면과,「누구를 지지한다」고 터놓고 말할 수 없는 선거법 탓으로,흑백선전은 더욱 가열된다.
세후보가 이번 선거에 내건 그 많은 공약이야말로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되어 나오고 있으니 「나의 집권만이 5년 안에 한국을 세계 열강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새 신화의 창출」 그것이다. 그러나 그 공약의 실현성에 대해 국민은 대체로 머리를 흔든다.
과거의 대선에서도 그랬듯 공약남발을 국민이 믿지 않을줄 알면서도 후보들은 연일 곳곳에서 최면이라도 걸듯 직사포를 쏘아댄다. 그 우민화정견을 멍청히 듣는 귀가 있기에 그들은 마지막 한표를 찾아 난장을 헤집고 있는 셈이다.
지난 토요일 정주영후보의 대규모 유세장인 여의도광장으로 나가보았다.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더니 낮에는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찬비까지 뿌렸다. 강원도 산골짜기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자수성가로 오늘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정 후보의 다난한 복역이라도 일깨워주는 듯한 악천후였다.
일기가 불순함에도 여의도광장은 이번 대선열기를 대변하듯 국민당 지지자들로 가득찼다. 적게 잡아 30만,많게는 1백만명이라는 종잡을 수 없는 집계를 접어두고라도 미처 우산을 준비못하고 나온 그 많은 사람들의 추위에 떠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간이주점에서 소주에 오뎅국물로 속을 덥히는 남자들은 덜 볼썽사나웠으나,눈비를 그대로 맞고 삼삼오오 뭉쳐앉아 고성능 확성기를 통한 사회자의 선창에 따라 『정주영』을 연호하는 부녀자들의 외침은 차라리 절규였다. 정말 「대선이 뭐길래」 저 고통을 감수하는가 싶었고,「현대」라는 거대기업의 자금력·조직력과 국민당이 언제 이만큼 세를 확장했는가 놀라움 또한 새삼스러웠다.
정주영후보가 단상에 등단하자 수만개의 오색풍선이 흐린 하늘을 수놓았고,폭죽이 연달아 터졌다. 민자·민주당이 시민의 교통불편을 내세워 여의도 대집회를 취소했어도,국민당이 이를 감행한 이유는 한판 큰 잔치를 치밀하게 준비해온 흔적에서도 잘 드러났다.
당원 동원에 따른 수고비,비에 젖는 산적한 홍보물… 열심히 번 돈을 자기 마음대로 쓰는 것이야 누가 뭐랄까마는,분배의 균등화에 앞장서 저소득층 보듬기와 양로원·고아원·장애자 재활원·도서관 등 복지사업에 돌려주기 등 칭찬받을 일도 많은데 이 무슨 작태인가 싶기도 했고,한국정치의 낙후성이 새삼 되짚어졌다.
정주영후보가 이종찬후보의 사퇴에 따른 국민당 합류를 발표하자,옆에 섰던 한 청년이 『이 후보가 50만표는 가져올테니 이제야 말로 떼놓은 당상』이라고 흥분했다. 그동안의 처신과 관련해 볼때 이씨가 과연 그정도의 표몰이를 해줄까는 의심스러웠다.
국민당의 유세장마다 그렇듯,6공의 비리와 김영삼후보에 대한 질타가 이어졌다. 탁월한 개인적 능력은 인정하지만 정경유착 의혹속에 성장해온 대기업주가 여당만을 싸잡아 공격하는데는 자가당착도 있어보였다.
세계 정치무대에서 이념분쟁은 사라지고 이제는 경제의 정치성이 중요하다는 강조만으로도 그 연륜의 입지가 설텐데 이는 이론이고 표를 긁는데는 역시 적수의 상품부터 뭉개고 보는 판매전략적 전투가 현실임을 간파한 탓일까.
돌아오는 길에 이 많은 인파가 악천후를 무릅쓰고 어떻게 귀가할까 걱정스럽기도 했으나,이번 선거로 탕진될 조규모의 엄청난 3당 선거비용을 연상하자 「대통령병」치유를 위한 그의 「집권 3년만에 내각제 선택」이란 주장만은 꽤나 설득력이 있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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