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말로만 '우리 민족끼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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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당국이 파행으로 끝난 6.15 통일대축전 행사와 관련해 22일 입을 열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란 대남 기구가 나섰다. 그 주장은 "축전이 진통을 겪은 건 한나라당 때문"이란 것이다. 조평통은 "한나라당이 축전을 파탄시켜 대통령 선거에 악용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곤 사죄까지 요구했다. 참으로 황당한 주장이다.

이 행사가 파국으로 치달은 건 15일 남측 대표단의 귀빈석 진입을 북한 기관원들이 막았기 때문이었다. 전날 개막식 때 이른바 주석단(귀빈석)에 박계동 의원을 한나라당 대표로 앉게 했다가 하루 만에 '착석 불가'로 입장을 바꿔 남측 대표단의 반발을 초래한 것이다.

이 행사의 북측 위원장인 안경호 조평통 부위원장은 "여러 사정으로 행사가 지연돼 죄송하다"며 남측의 백낙청 상임대표와 함께 공개 사과까지 했다.

그러나 노동당 대남 전략가들의 태도는 닷새 만에 돌변했다. 조평통은 "한나라당은 축전에 참가할 명분이나 자격, 체면도 없었다"고 강변했다. 그렇다면 왜 3명의 한나라당 의원에게 방북 초청장을 내주고, 환영만찬까지 했는지 해명해야 한다. '안마당에서 망신주기'와 같은 허접한 수준의 대남 전략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북한은 "축전이 성공하면 (대통령)선거를 앞둔 한나라당에 절대적으로 불리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한나라당 의원들이 판을 깼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한국 대선의 판세가 6.15 행사 하나로 좌우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니 한심한 일이다. 대남 문제를 수십 년 다룬 전략가를 자처해 온 그들이 아닌가.

임동옥 전 통일전선부장(지난해 8월 사망)을 비롯한 냉전 시기의 대남 일꾼들이 사라지고 국제감각을 갖췄다는 김양건 전 노동당 국제부장이 대남총책인 통일전선부장에 임명되자 남측 일각에서는 상당한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이들의 인식과 행태는 여전히 시대착오적이다.

북한은 자신의 체제와 최고지도자를 '악의 축'으로 조롱하던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고위급 외교관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북.미 화해의 제스처를 한껏 과시했다. 바로 그날 동족에게는 욕지거리에 가까운 비난과 저주를 퍼부었다. 이게 그들이 금과옥조로 받드는 '우리 민족끼리'의 정신인지 묻고 싶다.

이영종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