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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만평>MBC 창사 특집극 『억새 바람』|교포사회의 실상 총체적 조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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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20세기 약속의 땅 미국. 많은 일자리와 드넓은 정치적 자유, 자신만 열심히 일하면 억압받지 않고 풍요롭게 살수 있다는 신화의 고장 미국.
그러나 과연 자유의 여신상을 우러러보며 낯선 땅에 첫발을 디딘 이민자들에게도 이 약속은 지켜졌을까.
MBC-TV의 창사 특집극『억새바람』은 미국으로 이민간 한 가족이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신화가 깨지면서 겪는 자기상실의 고통과 그 폐허 위에서도 억새처럼 질기게 「코리안 드림」을 피워내는 극복의 과정을 통해 교포사회의 실체를 진지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간 미국 이민사회를 다룬 드라마 대부분은 흥미위주의 개인사에 치중해 다양한 세대가 공존하는 교포사회의 전체상을 그려내는데는 소홀했다.
손쉽게 극적 재미를 얻으려 미국사회의 어두운 면만 집중 부각시키거나 일방적으로 미화시키다 보니 오히려 교포사회의 실상이 왜곡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억새바람』은 기존의 드라마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교포사회의 본모습은 어떤 것이며 고민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진지하게 접근한다.
그러한 자세는 극의 구성에서부터 엿보인다.
『억새바람』은 한 교사가족의 20여 년에 걸친 이민생활을 연대기 형식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극적 긴장감은 다소 떨어진다.
그러나 30대 초반의 남녀, 이미 우리 정서가 굳은 큰아들과 쉽게 동화되어 가는 막내로 구성된 가족이 각기 다른 삶의 현장에서 겪는 체험들을 같은 비중을 두고 그리고 있기 때문에 이민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데는 가장 적합한 형식으로 보인다.
정확한 메시지 전달을 위해 극적 요소를 과감히 배제한 것은 제작진의 치열한 주제의식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러나 『억새바람』은 바로 이런 「무언가 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전체적으로 섬세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극의 곳곳에서 작위적인 묘사가 돌출되고 있다.
김미숙이 병원에서 아들을 찾기 위해 한국말을 하며 울부짖는 장면은 지나친 신파라는 느낌을 준다.
한의 민족정서를 지닌 우리시청자들에게 슬픔은 가장 힘 안들이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재료.
이민생활의 어려움을 부각시키기 위해 눈물을 쥐어짜는 손쉬운 방법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면 애초에 기획했던 이민사회의 전체상은 시청자들의 뇌에 도달하기 전에 눈물에 녹아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남재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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