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인 칼럼] ‘제주 프로세스’로 동북아의 평화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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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27면

1975년 8월 1일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 동맹국 대표들이 만났다. 3년여에 걸친 대화와 협의, 그리고 협상 끝에 ‘헬싱키 최종 협약(Helsinki Final Act)’을 채택하고,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를 출범시켰다. CSCE는 그 후 56개 국가가 참여하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라는 국제기구로 개편됐고, 유럽의 다자안보협력과 안보공동체 구축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왔다.

헬싱키 협약 체결 이후 유럽 국가들은 35년간 지속해온 안보 분야의 대화와 협의, 자발적 협력의 과정을 통상 ‘헬싱키 프로세스’로 부르고 있다. ‘헬싱키 프로세스’와 그 결과로 제도화된 CSCE/OSCE는 조기경보, 분쟁예방, 위기관리 등 군사적 신뢰구축을 통해 전쟁의 우발적 발생을 방지해왔을 뿐만 아니라 분쟁을 겪은 국가들에 대한 전후 복구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CSCE/OSCE의 활동은 군사적 신뢰구축과 예방 외교에 국한되지 않았다. 당시 냉전구조하에서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NATO와 바르샤바 동맹국들 간에 무역과 환경 분야의 교류ㆍ협력을 활성화하는 동시에 인적ㆍ사회문화적 교류 증진을 통한 긴장완화에도 크게 공헌한 바 있다. 사실 이러한 비군사 분야의 교류ㆍ협력이 궁극적으로는 바르샤바 동맹의 해체를 촉진하고 새로운 유럽 안보공동체의 탄생을 가져왔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유럽에서의 이러한 다자안보협력이 동북아에 주는 함의는 매우 크다. 무엇보다 적대 또는 준(準)적대적 관계에 있는 국가들 간에도 공동안보(common security)의 공감대 형성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대화와 상호 협의, 합의 구축을 통해 협력안보(cooperative security)를 적극적으로 모색할 수도 있다. 또한 덜 민감한 비군사 분야(경제ㆍ환경ㆍ사회ㆍ문화 등)의 교류ㆍ협력을 통해 군사 부문에서의 신뢰구축을 극대화해 나간다는 포괄 안보(comprehensive security) 개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23일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유럽 경험의 탐색’이라는 주제하에 제4회 제주평화포럼이 개최됐다. 여기에 참석한 유럽과 동북아의 저명한 안보 전문가들은 유럽에 냉전의 종식을 가져오고 안보공동체의 구축을 가능케 했던 이 ‘헬싱키 프로세스’가 이 지역에서도 재현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제주 프로세스’의 출범을 제안했다. 군사동맹을 중심으로 한 현실주의 처방만으로는 북핵 문제나 첨예하게 전개되고 있는 역내 군비경쟁 등 동북아의 안보 딜레마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역내 다자안보협력을 미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포럼 참가자들은 또한 다자안보협력체제 구축에 있어서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유럽의 경험과 동북아의 지정학적 구도로 보아 강대국들보다 한국이 이러한 역할을 하기에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다자안보협력 노력이 예방외교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미국과의 양자 동맹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보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보였다.

이미 동북아 다자안보협력 구상은 6자회담의 주요 의제로 자리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 북핵 문제 해결이 가시화되면서 더 탄력을 받고 있다. 이는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 하겠다. 이번 평화포럼을 계기로 ‘평화의 섬’ 제주에서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토의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제주 프로세스’가 활성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제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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