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심장 뛰게 하는 남자는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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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25면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파로(Faro)로 가는 장거리 버스 안에서 키가 훤칠하게 큰 한 영국인 남자를 만났다. 나처럼 세계를 떠돌며 글을 쓰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였다. 우리는 장거리 버스의 무료함을 조금 덜어볼 목적으로 이런저런 화제를 꺼내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대화가 꽤 재미있게 흘러갔다. 그때 그가 내게 던진 질문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미스 허니의 노마딕 라이프

“과거로 돌아가서 꼭 한 사람만 죽일 수 있는 특별한 면책특권이 주어진다면 넌 누굴 죽이고 싶지?”

흥미로웠지만 답변하기 아주 어려운 질문이었다. 일단 나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해본 적이 없었다-슬픈 일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사랑한 사람도 없었다는 말일 테니까-. 대한민국을 형편없게 만든 사람들을 미워하지만 나는 그들을 암살하고 싶을 정도로 애국적인 인간이 아니다. 내가 인간에 대해 살의를 느낄 때는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를 때뿐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를 죽여? 인간이 자연의 소유주이며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사람들에게 설파한 그 끔찍한 철학자 말이다.
반면 같은 질문에 대한 그 영국인 저널리스트의 답변은 내게 충격 그 자체였다. “바우하우스를 설립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 단조롭고 멋대가리 없는 현대의 콘크리트 건축물이 모두 그 영향력 아래서 아직도 기세등등 잘난 척하고 있는 꼴이란 내게 정말로 참을 수 없이 역겹게 느껴지거든.”

어떤 면에서 바우하우스 추종자였던 나는 그의 의견에 크게 반발했다. 발터 그로피우스의 자기도취적인 선언문은 지금 읽으면 약간 우스꽝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적어도 대량생산이라는 현대 산업사회의 피할 수 없는 대세를 다리 꼬고 앉아 대책 없이 냉소하기보다는 그 방식을 적극 이용하여 예술과 기술을 통합하려고 했던 노력만큼은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믿고 있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차이점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일에 무척이나 너그러워진다. 내 우상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그는 증오한다. 이건 이데올로기나 세계관이 다른 만큼이나 엄청난 차이다. 하지만 나는 그 남자를 ‘댄디’라는 이름으로 이해했고 그 점이 오히려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의 코트가 ‘나는 댄디’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니진스키의 무용복처럼 우아하게 진동하는 트위드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런 사소한 흔들림으로 현대 문명이라는 결코 우아하지 않은 체제와 겨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영국인 특유의 허영심으로 멋 부리기(모자 없이는 외출하지 않고 가끔은 게이처럼 보이는 셔츠도 서슴없이 입는다)를 좋아하지만, 47세 나이에 가족도 없이 망명자처럼 세계를 떠돌며 살고 있었고, 원고를 써서 월세를 마련하는 처지이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토머스 딜런의 시를 읽는다고 했다. 혹시나 하고 물어보니 그는 역시 아일랜드인의 피가 흐르는 오스카 와일드의 신봉자였다.

남자들은 대개 마흔(어쩌면 서른 즈음부터)이 넘으면 젊은 시절 자신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것들과 너무나 쉽게 안녕을 고하고 속수무책으로 진부해진다. 하지만 세상에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결코 ‘순순히 그 편안한 밤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은 느닷없이 여자로 하여금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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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허니’ 김경씨는 패션 칼럼니스트이자 인터뷰어로 개성 넘치는 책 『뷰티풀 몬스터』『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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