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규격화된 「틀」따라 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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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한국에서 여행 온 일본어를 모르는 친구들에게 늘 하던 말이 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는 헤매지 말고 그 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봐라. 그곳이 지하철이든 백화점이든 빌딩 안이든 어디여도 좋다. 바로 그 주변 어딘가에 꼭 안내판이 있다.』
이상스러울 정도로 그렇다. 길 모르는 사람을 데리고 다니며 통계를 내 만들어 세우기라도 한 것일까. 「어디로 가야하지」하고 의문이 드는 바로 그 자리에 안내판이 어김없이 서있다.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를 능동적으로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
지하철 구단시타(구단하)역을 오갈 때마다 나는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곤 했다. 이 역에는 신주쿠(신숙)행 안내표시가 벽·바닥·천장 세 군데나 덕지덕지 붙어있다. 그런데도 또 어떻게 타라고 안내방송을 해댄다. 그리고는 거기에도 성에 안 차는지 바닥에 아예 금을 그어 놓았다. 그 선만 따라가면 신주쿠 행 전차가 들어오는 홈에 가 서는 것이다. 친절을 넘어서서 이 사람들이 누굴 바보로 아나 싶을 정도다.
이것은 주체인 「나」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수동적으로 되어버리는 한 예일 뿐이다. 사회전체가 그렇게 상대방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나라가 일본이다.
여름 장마가 끝나면 『더운데 어떻게 지내십니까』하는 인사로 주겐(중원)이라는 선물시즌(?)이 있고 또 연말이면 세보라고 해 『지난 한해 고마웠습니다』하는 공개적인 뇌물시즌(?)이 있다. 이때 선물을 안 보냈다가는 그야말로 「후레자식」이 된다. 선물도 문안 인사도 이렇게 정해놓고 한다.
경조사에 내는 돈만 해도 그렇다. 액수야 알아서 넣는다지만 봉투까지 정해져 있다. 세배 돈 넣는 봉투, 아이 낳은 집에 가 출산 축하금 넣는 봉투, 결혼 축의금 넣는 봉투, 상가에 부의금 넣는 봉투…하다못해 레슨비 넣는 봉투까지 이 모든 것을 문방구에서 팔고 있다.
상점 점원의 그토록 친절한 태도도 80% 쯤은 다 정해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므로 물건을 안 사고 나오면서 점원의 친절 때문에 한국인들이 너무 송구스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것도 다정해진, 월급에 들어 있는 친절이니까.
이런 수동태 사회 속에서 살다 보면 사람이 단순해지지 않을 수 없다.
결혼식은 교회, 장례식은 절, 복을 비는 것은 신사…이렇게 모든 게 정해져 있다. 그가 무슨 종교를 믿느냐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래서 일본에는 결혼식만 올리는 희한한 교회도 있다. 그 뿐인가. 새해가 되면 교통안전을 빈답시고 신사에서 준 솔잎이나 짚으로 만든 부적 같은 것을 벤츠 앞 범퍼에 달고 다니는 나라가 일본이다.
정치도 그렇다. 만년 여당 자민당에 만년 야당 사회당에 구색 맞추며 공산당이 있고, 천왕제 반대의 혁신계가 있나 하면 TV토론의 단골손님으로 밥 빌어먹고 사는 무책임 좌경이 있고, 테러도 마다 않는 우익들이 있다. 그렇게 정해져 있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은 없다. 상대는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공생 관계인 것이다.
잘못을 뉘우치고 비는 것을 일본에서는 「오와비」라고 한다. 죽여 놓고도 미안하다고만 하면 그만이다. 마음의 앙금이 지워지게 이쪽의 정서를 복원해 달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요구하는 사죄라면, 일본은 다르다.
『죽여 주십시오』라며 허리를 굽히면 그것으로 오와비가 되고 용서가 끝난다. 그 사죄의 문구까지도 정해져 있다.
그래서 일본 사회에는 오와비가 넘친다. 야구 선수가 잘못하면 구단주가 『사죄합니다』라고 고개를 숙이고, 열차사고가 나면 철도 회사 총수가 기자들을 불러다놓고 『사죄합니다』라고 한다. 그러면 용서된다. 오와비를 했는데도 용서를 안 해주면 그때는 적반하장이 된다. 오와비까지 했는데 왜 자꾸 물고 늘어 지느냐며 오히려 화를 내며 대든다.
문제는 이 「틀」이다. 그것을 깨는 것도 용납되지 않지만 누구도 그것을 깨려고 하지도 않는다. 정해 놓고, 다같이 그렇게 사니까 여기에 한번 물들었다하면 그렇게 편할 수 없다.
그러니 가만히만 있으면 된다. 그러다가 따라하기만 하면 된다. 무엇을 따라 하느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을 따라 하든가,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하면 된다. 하나가 사회적 통념에 따르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상대적인 의례에 따르는 것만 다를 뿐나」를 수동형으로 만들기는 마찬가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일종의 과잉보호다. 전 국민의 과보호 화다. 서로가 서로를 과보호 한다고나 할까.
일본을 규정하는 수 없이 많은 말들이 있지만 거기에 하나 더 보탠다면 일본은 「수동태 사회」가 아닌가 싶다. 사회의 어느 한 구석, 개인의 어느 하루를 들여다보아도 「수동적 일상」으로 가득 차 있다. 아니,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떠오르는 의문이 하나 있다. 개성이 강하거나 독창적인 사람이 살아가기에 일본은 숨막히게 불편한 나라는 아닐까. 모든 것이 규격화되어 있는 사회를 살금살금 따라가며 살아가면 되는 그 하루하루를 질식할 것처럼 느끼는 일본인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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