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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김장생「사계예학」의 종실 둔암서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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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하늘을 나는 새, 땅에 기는 짐승, 그것들과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삶을 가지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선신들은 이런 물음 앞에 참으로 많은 지혜를 밝혀 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사람이 지켜야할 예절과 법도를 학문으로 정립하고 실천으로 전통을 세운 분이 있으니 그가 곧 사계 김장생이다.
그러면 김장생이 갈고 닦아서 이룩한 이 나라의 예학, 이른바 「사계예학」의 고향은 어디인가. 아무래도 충청남도 남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 고을 논산의 둔암서원(연산면림리)을 찾을 수밖에 없다.
호남고속도로가 지나가고 호남선 새마을 열차가 서는 논산은 연무대가 있어 더 널리 알려진 곳 읍내에서 서쪽에 있는 대전을 향해 20리 남짓 가면서 원말이 나오고 큰 길 옆에 홍살문이 마중 나와 이내 둔암서원의 전경을 안내한다.
둔암서원, 우암 송시열이 썼다는 현판이 걸린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예학을 강론하던 양성당이 서 있고 왼쪽에 지금도 후학들이 때때로 모여 사계학을 공부하는 응도당이 있어 이 나라 예법의 종가답게 그날의 쩌렁한 위엄을 뿜고 있다.

<읽고 또 읽고 생각>
그러면 이곳이 어찌하여 이 나라 예학의 종가로 일컬어지게 되었는가를 더듬어 가보자. 김장생은 명종3년(1548년)7월8일 서울 황화방 정릉동(지금의 중구정동)에서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김계휘를 아버지로 평산신씨를 어머니로 해 태어난다.
본관은 광산이며 자는 희원이고 호는 사계다. 어려서부터 품성이 신중하여 덕기가 될 자질을 보였다고 하나 글재주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열한살에 어머니 신씨를 여의었는데 이곳 연산 고정리의 선산에 장사지내게 된다. 김장생의 선대가 언제부터 연산에 터를 잡고 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고정리에는 세조13년(1467년)에 세워진 「양천허씨 정려」가 산뜻하게 단청을 입고 지켜있어 김장생 가문의 자랑스러운 내력을 전해준다.
허씨 부인은 조선조 태종 때 대사헌을 지냈고 배불정책의 강경론자였던 허응의 딸로 정종때 대사헌을 지낸 김약채의 아들 문과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 예문관 검열로 앞길이 약속되던 남편 김문이 태조2년(1393년)병으로 죽으니 허씨 부인은 열일곱살이었다.
어린 딸의 장래를 생각한 친가에서 개가시킬 뜻을 보이자 허씨부인은 몸종을 데리고 개성에서 연산의 시댁까지 걸어서 찾아온다. 그때 유복자로 낳은 아들 철산은 감찰을 지냈으며 손자 국광은 좌의정에 오른다. 김장생의 아버지 계휘는 국광의 고손이니 허씨부인의 정절의 탯줄이 김장생의 예학에까지 미치고 있음이 아닌가.
김장생은 13세에 당대의 거유 귀봉 송익필의 문하에서 사서·근사록 등을 읽는 행운을 얻었는데 그의 학문의 기초가 여기서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김장생의 예학은 바로 스승 송익필의 뿌리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게 된다.
그는 뒷날 제자인 송시열에게 「구봉은 범상하지 않아 글을 읽으면 거침이 없었는데, 다른 사람도 그렇게 믿고 한번 풀이해주면 되풀이하지 않았다…. 나는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하나씩 알게 되었고 천백번 읽고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것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나처럼 열심히 글 읽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고 회고한 것으로 미루어 그의 공부가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20세에 그는 율곡 이이의 문하에 들어가 성학을 배우게 된다. 율곡이 해주의 석담으로 가게 되니 따라가 연마를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처럼 과거를 위해 공부하지 않았음을 「왕언첩서」에서 밝히고 있다.
「나는 기질이 어리석고 둔하여 어려서 배움을 잃었고 과거를 위한 학문에도 뜻이 없었다. 스무살에 비로소 옛 선인의 학문이 있음을 깨닫게 되어 선현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의 줄거리를 듣게 되었다」고. 스스로 어리석고 둔하다고 한 것은 자신을 낮추는 예법이거니와 과거를 위한 학문을 하지 않았음은 그가 과거에 응시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는 일로 당시의 시대조류로 비춰 볼 때 매우 어려운 결단이었다.

<이이도 재능 인정>
그가 28세 때 부친 계휘가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 부친을 따라 평양으로 갈 때 이이는 「김장생이 석담에 와서 공부를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가매 시를 주노라(김희원래 석담수업 사귀평양 시이증지)」는 긴 제목의 시로 작별을 한다.
천리길 오가며 쓸쓸한 물가에서 함께 지내고 구름과 달 벗하며 기쁨도 같이 했었네
빈손으로 보내는 것 내 부끄럽기 그지없네만
헤어진 후 모름지기 그대 눈부심을 자주 보리라.
(천리상종적막빈 동운계월건이신 귀시수낭오감괴 별후수교괄목빈)
이렇듯 율곡은 그가 뒷날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시로 적어두었다. 이밖에도 율곡은 그가 아버지를 따라 제주에 갈 때 준시가 있고 송익필도 김장생의 공산정시」에 답한 시를 비롯, 제자를 위해 4편이나 시를 지었는데 어전 일인지 스승에게 바친 그의 시가 전해오고 있지 않다.
『사계전서』에도 14세 무렵 쓴 것으로 보이는 「가야산에서 윤정경을 만나서(가야산봉윤정경)」, 24세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다시 가야산에 와서(재유가야산)」, 그리고 74세에 사랑하던 제자 최명룡의 죽음을 노래한 32행의 장시「만최여윤」3편밖에는 실려있지 않다.
그러나 『양성당기』에 보면 그는 둔암(지금 연산면 임리 숲말에 큰 바위가 있어 둔암이라 불렀고 처음 이곳에 서원을 세워 「둔암서원」이 된 것이다)에 아한정을 짓고 시를 읊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정자가 불타자 다시 양성당을 지어 옛 시들을 걸어놓고 감상하면서 시인들에게 화답을 받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14세 무렵에 쓴 「가야산에서 윤정경을 만나서」에서 이미 그의 시는 무르익고 있었다.
『처음 가야산 절에서 만났을 때
옷은 비에 얼룩져 있었지
만나자 한번 웃고는
마주하고 바라보며 말을 잊었었지.
(해후가야사 행장대우흔 상봉방일소 상대극망언)』
이 시로부터 60년이 흐른 뒤인 74세에 사랑하는 제자의 죽음에 바친 32행의 「최명룡의 죽음에 바치는 노래(만최여윤)」는 저절로 울음이 솟구쳐 나오는 처절한 가락으로 그의 유려한 시 문장을 읽게 한다.
『나의 어진 그대 나이 오십에 갑자기 이리될줄 어찌 생각했으랴
(중략)
아들아 불러도 아들은 듣지 못하고
아들아 울어도 아들은 알지 못하는구나
아직 젊거늘 나보다 먼저 가니
늙은 나는 얼마나 남았겠느냐
변덕이 심한 거친 세상을
오래 살다가 신을 잃었구나
온전히 살다가 또 온전히 돌아가니
그대는 무엇이 슬프겠느냐
거문고 줄을 끊어도 다시 소리가 들리고
책을 펼치면 또 생각이 나는구나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 지금 가고 없으니
내 통곡이 사사로운 정 때문이겠느냐.』

<84세로 천수 마쳐>
선조11년(1578년)벼슬에 나갈 생각을 않던 김장생은 31세로 그의 학문이 높음을 인정받아 창릉 참봉으로 추천을 받는다. 45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호조정랑으로 군량조달에 공을 세우기도 하고 정묘호란 때는 양호호소사로 후금과의 화의에 반대한다. 그러나 광해군5년(1613년)계축옥사가 일어나 김장생의 서동생 경계·평손이 연루되자 화가 미칠뻔 하였으나 그의 학덕과 결백이 입증되어 연산에 돌아와서 저술을 하고 후학을 가르친다. 그리고 10년 뒤인 인조원년 76세로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어 사세 형조참판으로 그의 사관의 길은 끝이 난다. 그러나 그에게는 출사가 본분은 아니었다. 36세에 이 땅에 상례를 확립한 『상례비요』를 저술한 것을 비롯, 51세에 『근사녹석의』, 52세에 『가례집람』, 71세에 『경서변의』등 많은 저서를 냈고 아들 김집, 송시열·송준길 등에게 도학과 예학·성학과 성리학을 가르쳐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렇다고 그는 현실정치에 있어 방관자였던 것은 아니다. 인조반정이 성사되자 그는 76세로 인조 앞에 나아가 왕도를 진언하고 만언소를 올려 제도적 개혁과 민생정치를 주창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곳 고향에 내려와 인조9년(1631년)84세로 천수를 다하여 선조들이 묻힌 고정리 선산에 묻힌다.【사진=오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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