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 인상짙은 「빈 껍데기 블랙박스」/왜 비행기록등 전달 안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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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진실감추려 계획된 일/격추 정당화위해 관련자료 일부러 파기
왜 러시아측이 한국측에 KAL 007기 블랙박스를 인계하면서 사고원인을 밝혀줄 핵심인 비행경로기록장치(Digital Flight Data Recorder)테이프를 넘겨주지 않았을까.
우선 실수에 의한 것,고의에 의한 것이라는 두가지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지만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노태우대통령에게 기본조약 조인식장에서 직접 전달한 만큼 실수로 빠뜨렸다는 가정은 배제된다. 즉 예고된 사항은 아니라 하더라도 국가원수간의 인수·인계절차에서 러시아측이 내용물을 사전에 점검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전상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행경로기록장치 테이프가 빠진 것은 고의적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배경을 몇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첫번째 가능성은 불안한 러시아의 현 정국을 감안할때 반옐친파가 의도적으로 테이프를 빼돌림으로써 국제무대에서 옐친대통령을 신뢰감이 없는 인물로 전락시키기 위한 음모를 들 수 있다.
이 가능성은 앞으로의 사태를 주시하면서 간접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겠지만 현 단계에서 단정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는 아니다.
두번째 가능성은 KAL 007기의 피격과 관련된 진실이 드러날 경우 러시아가 감당해야할 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이라는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현재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의 조사결과나 러시아측이 한국에 인계한 사본 등을 근거로 할때 ▲KAL 007기가 항로를 이탈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구소련의 영공을 침범했고 구소련은 자위권을 발동,요격해 추락시켰다는 평면적 사실 이외에 KAL기의 항로이탈원인,구소련 항공망 침범 정도 등 사고원인 규명에 필요한 핵심사항은 없었다.
따라서 이같은 평면적인 사실만으로는 피격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 현재로선 구소련을 승계한 러시아측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러시아측은 지금까지 피격 KAL기가 앵커리지 공항을 이륙한 직후 관성항법장치(INS)를 사용하지 않고 나침방위비행(Magnetic Heading)을 함으로써 항로를 이탈한 것으로 항적도를 그린 구소련의 사고직후 발표를 견지,10월14일 옐친통령이 모스크바에서 장상현교통부차관에게 인계한 사본자료에도 같은 내용의 항적도를 전달했다. 이 항적도에는 피격지점과 앵커리지 공항이 일직선으로 그려져 있어 KAL기의 나침방위비행을 뒷받침하고 있고 당초 구소련이 이를 스파이비행의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KAL기가 나침방위비행을 하지 않고 관성항법장치를 사용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관성항법장치는 항로의 일정지점(Way Point)의 좌표를 입력,비행해야하기 때문에 항적도가 일직선으로 그려질 수 없으며 이 경우 항로 이탈의 항적도가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구소련측이 비행경로기록장치 테이프를 해독한뒤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테이프를 파기,한국측에 전달할 수 없었다는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러시아측이 테이프를 보관하고 있다면 구소련과는 달리 국제사회의 비난과 피해자들에 대한 사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엄주혁기자>
◎한·러관계 어떤 영향 미치나/정상회담 성과에 상처/한국 국민 감정에 악영향… 후속조치 필요
옐친대통령이 전달한 KAL기의 블랙박스에 음성기록테이프(CVR)만 있고,비행기록자료(FDR)가 없는 것은 한·러 정상회담의 성과를 완전히 무산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서 외무부는 긴장하고 있다. KAL기가 격추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FDR다. 그런데 정작 이것을 빼고 전달한 것이 고의적인 것이라면 국가원수를 상대로 한 「속임수」가 된다. 따라서 국민감정을 들끓게 하고 양국관계를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판단이다. 외무부의 한 당국자는 이 사실을 27일 귀임 직전 교통부를 방문한 홍순영주러시아대사를 통해 전달받았으며,홍 대사가 모스크바에 가는 즉시 경위를 확인할 것을 지시했다고 말했다.
외무부의 한 소식통은 이 사실이 뒤늦게 공개된데 대해 『외교관의 상식으로 볼때 러시아측이 왜 FDR를 빠뜨리고 전달했는지 확인될 때까지는 공개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옐친대통령은 방한에 앞서 노태우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KAL기 블랙박스」를 전달하겠다고 말했고,지난 19일 전달할 때도 「블랙박스 본체와 테이프」라고 말했을뿐 구체적인 내용물 목록은 전달하지 않았었다. 홍 대사도 옐친대통령의 방한에 앞서 서울로 돌아오며 러시아 외무부 등에 「테이프」의 내용을 확인했으나 『그 내용은 옐친대통령만 알고 있고 우리는 모른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맞춰볼때 첫째 가능성은 옐친대통령이 의도적으로 노 대통령을 속였을 경우다. 구체적으로 FDR를 전달한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있다가 우리측이 그 내용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정상회담에서 깜짝쇼를 벌여 생색만 내고 어물쩍 넘어갔다는 추측이다.
그러나 이 경우 옐친대통령이 「반인권적인 행위」라고 비난한 과거정권을 옹호하기 위해 금방 탄로나고 양국관계만 해칠 일을 했겠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따라서 정부내 일부 관리들은 러시아내,특히 정보기관내에 아직 보수파가 다수를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옐친대통령도 몰랐거나,과거 정보기관내에서 망실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추측하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어느 경우건 러시아측이 전달내용을 감추고 있다가 중요 부분을 뺀 껍떼기 블랙박스만 전달한 것은 한국측을 기만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고 외교적으로 문제가 야기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한국 정부도 테이프를 전달받은 직후 교통부의 전문가들 손에 바로 테이프가 넘어갔다면 테이프의 종류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제까지 감추어온 것은 블랙박스 전달로 높이 평가된 한·러 정상회담에 흠집을 내지 않으려는 의도적인 은폐가 아니냐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크게 망신당했다는 점 ▲한국 국민들의 감정에 미칠 영향 등을 생각하면 러시아측이 성의있는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양국관계에 큰 상처를 남길 것으로 보인다.<김진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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