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3당공약의 허실: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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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구체안 없이 조기실시엔 한목소리/정치자금과 맞물려 성사 쉽진 않아
나라안의 누구나 반드시 시행돼야 한다고들 하면서도 아직껏 시행되지 않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금융실명제다.
법상으로도 이미 10년 전인 82년 금융실명 거래에 관한 법률이 마련되었지만 지금까지 그 시행은 유보되고 있다.
시행은커녕 그간 82년과 90년 두차례나 이른바 실명제 파동을 거치면서 시행하느냐,마느냐로 국론이 나뉘고 그때마다 경제활동 전반에 적지 않은 동요가 일었다.
그러면서도 지난 87년 대통령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각 당은 예외없이 실명제 실시를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이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이제는 「금융자산 소득의 종합과세」라는 금융실명제의 본디 뜻은 많이 퇴색하고 「실명제만 실시되면 경제정의는 다 이루어진다」는 식의 정치적 구호만이 지나치게 앞세워지는 상황이 되었다.
이번 대선공약에 나타난 각 당의 실명제 실시 「의지」를 가늠해 보기 위해서는 지난 87년 대선과 그 이후의 상황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87년에 야당이 먼저 실명제 실시를 공약으로 내걸자 당시의 민정당은 앞뒤 재볼 겨를없이 실명제 실시를 역시 공약으로 내걸었다. 공약의 실현여부는 둘째 문제고 실명제를 공약으로 내걸지 않았다가는 「경제정의」를 외면하는 정당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는 정치적 상황이 더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6공정부가 출범하고 89년 4월에는 약속대로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기 위한 실무작업단을 일단 구성하고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실무작업단은 90년 하반기부터 실명제 예행연습을 거쳐 91년부터는 실명제를 전면 실시한다는 구체적 시행계획까지 마련해 놓았으나,90년 4월 정부는 개각을 단행하면서 실명제 실시준비단의 간판을 내리게 하고 말았다.
당시 야당은 이를 두고 6공정부를 거세게 비난했으나 여당측은 거꾸로 『야당 의원들 스스로가 실명제 실시연기를 내심 바라고 있으면서 무슨 소리냐』고 맞섰다.
금융실명제란 숨어있는 소득의 노출을 의미하는 것이며,이 경우 가장 민감한 문제의 하나가 바로 정치자금이라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상황은 지금이라고 해서 조금도 달라진바가 없다.
예컨대 그간 줄곧 실명제 실시를 반대해오던 전경련이 최근 각 당의 대선공약이 채 다나오기도 전에 먼저 「실명제 수용」의 입장을 치고 나온 것도,바꾸어 말하면 『경제에 주는 충격 때문에 실명제가 실시되지 못한다는 것이 정치권의 논리인데,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을테니 정치자금 등이 문제되지 않는다면 정치권이 먼저 실명제를 해보아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실명제는 정치권의 공약이나 의지 하나만으로 하루아침에 시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현금과 다름없이 우리나라에서만 고유하게 통용되고 있는 자기앞수표를 없애지 않고는 금융실명제가 의미가 없다. 또 도장을 찍는 오랜 관습 대신 서명하는 새로운 관행이 정착되지 않는한 일정금액 이하의 많은 소액 금융자산을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숨겨놓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을 길은 없다.
더 근본적으로는 모든 금융자산을 실명화 하여 노출시키려면 상속이나 증여를 내놓고 할 수 있을만큼 최고세율을 낮추고 이를 국회가 입법화 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정치수준에서 최고세율을 낮추자고 먼저 주장하고 나올 정당이 과연 있을지는 무척 의심스럽다.

<표>에서 보듯 각 당이 내건 실명제 공약은 간단명료하기 짝이없다.
실명제는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약을 공약답게 할 구체적 시행방안을 제시한 당은 하나도 없다. 다른 문제들은 다 놓아두고라도 정치자금 문제를 실명제와 연계시켜 다루고 있는 당은 어디에도 없다.
실명제에 대한 각 당의 의지가 너무 간단 명확한 것이 바로 실명제에 대한 각 당의 의지를 의심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김수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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